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비나 May 11. 2021

기념일을 잘 챙기는 섬세한 남자 1





1.


그는 오후 한 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다. 나는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난다. 오늘 삼 주년 기념일이라 일찍 만나 같이 있기로 해 놓고, 또 어제 늦게까지 회사 선배와 술을 마신 것이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데이트 약속에 소홀한 그에게 화를 내는 것도 이젠 지겹다. 아마 오늘도 그는 약속 시간인 두 시까지 연락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화가 난 나는 그의 집에 찾아가 그를 깨우겠지. 그러면 부스스한 그가 웃으며 미안하다고 하고. 나는 화가 덜 풀린 채로 그가 씻고 준비하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불만이 잔뜩 묻은 찝찝한 데이트를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시작할 것이다. 그는 잠들기 직전까지 숙취에 골골거리며 피곤해 할 것이다.


처음부터 이 인간이 이랬던 건 아니다. 내가 귀찮아 할 정도로 하루 종일 연락을 해 대고, 옆집에 사는 사람처럼 자주 집 앞에 찾아왔다. 별 쓸데 없는 것들을 일일이 다 기념하며 선물을 사 주고, 종종 자기 집에 데려가 음식을 해주곤 했다. 나에게 이토록 정성이 가득하던 정연수는 어디로 간 걸까? '사라진 사람을 찾는다'고 광고라도 내고 싶다.


두 시 반.

여전히 이 인간은 연락이 없다. 삼 주년이라고 원데이 클래스까지 가 직접 만든 생크림 케잌을 얼굴에 던져 버리고 싶다. 너덜해진 지갑이 안쓰러워 선물로 산 새 지갑을 백화점에 다시 가져가 환불해 버릴까?


드르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르륵


전화가 오는 걸 보니, 이제 일어났나보다.


"미안해. 왜 알람을 못 들었지?"

"알람은 맨날 못 듣잖아."

"금방 씻고 나갈게. 그냥 집에 있어. 집 앞으로 갈게."

"집 앞까지 오지 말고, 오거리에 스타벅스로 와. 거기 있을게."

"그래 알겠어. 미안해 진짜 빨리 씻"

.


미안하다는 목소리가 듣기 싫어 말이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어 버리고 바로 약속한 스타벅스로 출발한다. 꽃이 다 떨어진 가로수에 달린 초록잎들이 5월의 볕을 받아 탐스럽다. 내 기분과 무관한 나무들을 보며, 그와 무관해질 나를 상상해 본다. 지긋지긋하기만 한 그를 치워버린다면 나도 저 나무들처럼 더 산뜻해지지 않을까. 이젠 좀 다른 연애를 해 보고 싶다.


"우리 그만 하자."

"우리 현지, 화 많이 났구나? 오빠가 미안해."

"나 화내는 거 아냐."


토라졌을 때 종종 구사하는 반어법이라고 생각한 건지, 그는 내 옆자리로 와서 내 어깨를 끌어 안는다. 그러는 걸 보니 나도 헷갈리지만, 이번엔 반복하고 싶지 않아 그의 손을 내 몸에서 떼 낸다.


"진짜 나 오빠랑 헤어지고 싶어. 나 이런 연애 하기 싫어. 그냥 조용히 헤어져 줘."

"왜 그래~~~~ 진짜 다시는 안 그럴게. 진짜 미안해."


실랑이를 하기 싫었던 나는 '정말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스타벅스에서 나왔다. 단호한 내 태도에 당황한 건지, 그는 평소처럼 따라나오지 않았다.


이후 그는 몇 번 내게 미안하다며 연락을 해 왔고, 집앞으로 두어 번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나는 받아주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일단은 헤어져야 마음 속의 응어리가 풀어질 것 같았다.






그와 헤어지고, 나는 주말마다 소개팅을 했다. 그에 대한 미련이 조금은 남은 상태에서 새로운 남자들을 만나는 일이 다소 공허하기도 했지만, 신선하고 즐겁기도 했다. 너무 못생겼다거나, 말이  통할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부족하다거나, 보기 딱할 정도로 차림이 촌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내가 좋다는 남자를 마다하지 않고      만났다.


그러다 나는 정연수 그 인간과는 정 반대인, 굉장히 섬세한 한 남자를 만났다.


이무영.

그는 깎아 놓은 것처럼 얼굴이 단정했다. 어디서 관리를 받고 다니는 건지, 피부도 잡티나 모공 하나 보이지 않고 깨끗했다. 목소리도 발성을 교육받은 사람처럼 깔끔하게 울렸다. 무엇보다 신기한 , 남자 몸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들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씻는 남자라도 같이 오래 있다보면  냄새나 유분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방금 씻고 나온  같았다. 화장실에  때마다 향수를 뿌리는 건지,  은은한 우디 계열의 향이 났다.


"현지 씨는 여름 나무를 좋아하나 봐요. 길을 걸을 땐 늘 나무에 눈이 가 있어요."

"현지 씨는 흰 색이랑 파란 색 옷만 입네요. 좋아하는 색깔인가 봐요."

"현지 씨는 어디에 앉으면 늘 신발을 벗죠?! 그래서 제가 차 바닥도 깨끗이 청소해 놨어요. 신발 벗고 편하게 계세요."


그는 놀라울 정도로 내 취향을 잘 파악했다. 매일 밤 나에 대해 알게 된 정보를 적어 놓고 분석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정확하고 섬세했다. 삼 년을 만난 정연수 그 인간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사소한 행동이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기억하거나 기록해 두었고, 적절한 타이밍에 그걸 활용해 나를 감동시켰다. 그런 그에게 반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당연한 그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하루종일 데이트를 해도 지치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고, 헤어질 땐 늘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늘 15분(정확하게 늘 15분이라는 게 놀라웠다.) 먼저 와 나를 기다려 주었다. 절판된 책 '롤리타'를 읽고 싶다는 내 말에 어렵게 구했다며 그 작가의 다른 책도 같이 선물해 주었다. 내가 스치듯 말한 맛집도 모두 기억해 꼭 데려가 주었다.


나를 좋아하게 된 지 한 달이 된 날이라며 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인 러넌큘러스를 백 송이나 사 왔다. 내가 화이트골드 주얼리만 착용하는 걸 봐 둔건지, 내가 갖고 싶었던 t사의 화이트골드 브레이슬릿을 생일 선물로 사 주었다. 우리가 사귀게 된 지 한 달이 되는 날을 따로 기념해, 내가 가고 싶었던 해외 수종이 많은 식물원에 나를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대형 아가베를 선물해 주었다.


나는 그런 그가 너무 자랑스러워 친구들에게 그의 완벽함에 대해 말해주었다. 정연수 그 인간과 하나하나 비교하며. 부러워하며 그의 단점을 찾으려 애쓰는 친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어, 계모임을 할 때 그를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도 그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적당히 가져 주며 그녀들까지 모두 만족시켰다. 의기양양해진 나는 갈수록 그가 더 사랑스러워졌다.


그의 진짜 진가는 밤에 발현되었다. 그는 '여성을 만족시키는 대화법'에 이어 '여성을 만족시키는 섹스법' 강의를 듣고 실습까지 마친 남자처럼 완벽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내 섹스 취향과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그런 것들까지 거의 현실에 가깝게 실현시켜 주었다.


그렇게 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나는 정연수 그 인간을 점차 잊어갔다. 이렇게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처럼 괜찮은 남자를 만날 줄 았았으면, 더 빨리 그 인간이랑 헤어질걸. 하고 후회하면서.



근데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오빠는 무슨 영화 좋아해?"

"나도 현지랑 비슷한 영화 좋아해. 현지가 좋아하는 '노트북'이나 '이터널선샤인' 같은 로맨스 영화들."

"그런 거 말고, 나랑 다르게 좋아하는 건 없어?"

"음......글쎄? 현지야 잠시만 나 화장실 좀 다녀 올게."



***2화에서 계속됩니다.





https://brunch.co.kr/@redangel619/274



이전 05화 부조(浮彫)와 환조(丸彫)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