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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un 02. 2021

사랑하면 만지고 싶어






대부분의 예술은 감각 자체로 말한다.  좋아하는 그림이 뭐야? 라고 물으면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를 떠올린다. 요즘 즐겨듣는 음악은? 이라고 물으면 주걸륜의 시크릿 선율이 귀에 맴돈다. 무용은 몸의 동작으로, 영화는 영상으로 말한다.



여타 예술과 다르게 문학은 '언어'라는 추상으로 감각을 말한다. (이것은 사실 문학의 약점이자 강점이다. 문학과 연을 맺지 못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 약점 때문에 문학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고,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은 보통 이 강점 때문에 문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언어'의 실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다만 언어를 통해 말해지는 하나의 세계를 상상으로 구현시켜 가슴에 담아 둘 뿐이다. 사랑하는 작품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내 안에 새로운 세계가 하나씩 추가되는 것인데 그림이나 음악처럼 표현된 감각 자체를 소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 아쉬움을 글자를 적은 종이의 묶음인 '책'을 소장하는 것으로 달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거실 한 면에 큰 책장을 두고 소설책을 사 모으고 있다. 탐욕스런 정복가가 전리품을 모아 전시하듯 내 머릿속에 추가된 세계의 증거물로 종이책을 책장에 한 권 한 권 쌓아간다. 가끔 멍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영지(領地)을 감시하듯 한 권씩 꺼내서 다시 읽어본다. 세월을 따라 나의 영지는 농익어 더 아름다워지기도 하고, 퇴락하여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좋아하는 소설을 한 번만 읽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몇 주 전 밀리의 서재(전자책 구독 플랫폼)에서 문자가 왔다. 한 달 무료 정기 구독권을 준다고. 김영하 작가님의 '작별 인사'를 읽고 싶던 터라 덥썩 앱을 다시 받고 구독을 했다. 이전에 전자책 독서를 해보려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만지고 소장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한 권도 다 못 읽고 포기했었다. 근데 이번엔 의외로 종이책보다 더 자주 읽게 되었다. 브런치 때문에 핸드폰이나 태블릿으로 독서를 하는 습관이 들어 그런 것 같다. 아직 무료 구독 기간이 이 주 정도 남았는데 꽤 여러 권을 읽었다. '작별 인사(김영하)',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김이설)', '마르타의 일(박서련)'. 총 네 권을 완독하고 지금은 '너무 한낮의 연애(김금희)'를 읽고 있다.


처음 일주일 간은 (다른 분야에 워낙에 미니멀한 서타일인지라) '이제 독서도 미니멀하게 전자책으로 쭉 가야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읽은 소설들이 다 마음에 들어서인지, 전자책에 대한 생각은 바로 바뀌었다. 나중에 다시 읽고 싶기도 하고 꼭 그렇지 않더라고 종이책으로 소장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늘 서점에 가서 읽었던 것들을 전부 종이책으로 사 올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전자책에 익숙해지자마자, 종이책이 그리워졌다. 손에 쥐었을 때의 부피감. 부드러우면서 가슬한 촉감. 한 장 한 장 넘길 때 나는 차분한 소리. 접힌 표시. 연필로 줄을 그을 때 나는 소리. 그걸 다시 볼 때 느껴지는 지나간 시간의 실감. 고유하고도 소중한 감각들이다.


밀리의 서재에는 죄송하지만(먹튀...) 유료 구독을 하게 되진 않을 것 같다.



예전에 군대 간 애인을 기다려 본 적이 있다. 거의 매일을 보던 사람을 백 일 동안 보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백 일을 열 개로 쪼개어 열 밤만 더, 열 밤만 더 하며 백 일 휴가를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마침내 백 일이 지나고 그를 다시 만났던 날. 백 일 간 편지로 전화로 사진으로만 만나던 사람의 깜빡이는 눈과 웃음으로 벌어지는 입을 보고 기뻐 끌어안던 순간의 실감을 잊을 수 없다.


얼마 전 사랑하는 순돌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순돌이의 몸에서 나던 냄새와 짖던 소리와 보드랍고 따뜻하던 감촉이 떠오른다. 만지고 싶은 그리움이 사무친다.


문학이라는 만질 수 없는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은 그 세계를 열어 주는 문이라도 만지고 싶어한다. 그러하기에 오래된 나의 서가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를 넓혀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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