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런인생 Aug 19. 2024

신고식

1994

빅토리아 칼리지 기숙사의 식당은 버워시 홀이라고 불린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호그와트 식당의 다이소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식당의 내부는 1913년에 지어진 이래로 그다지 변한 게 별로 없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에도, 6.25가 발발했을 때에도, 인류가 달에 갔을 때에도 학생들은 저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해에는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었고 그 사건은 한동안 식탁의 화제에 올랐었다. 아침과 저녁이면 남쪽 벽의 기다란 유리창들을 뚫고 온 강한 햇빛이 성당처럼 높은 공간을 지나 테이블들을 비치고 있었다. 식당 끝에 위치한 단상 위 세로로 놓인 큰 테이블은 교수들이 앉는 곳이었고, 나머지는 학생들의 것이었다. 어디에도 씌어 있지는 않았지만 각각의 테이블들은 특정한 하우스의 학생들만 앉도록 몇십 년 동안 암묵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방문객들이나 타 기숙사에서 놀러 온 사람들이 모르고 남의 테이블에 앉더라도 비켜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고, 우리는 주로 이 테이블에 앉는데 만나서 반갑다, 어디서 왔냐 정도로 간단한 스몰토크를 했다.


내가 처음 식당에 들어간 날 사감은 같은 하우스 거주자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하우스의 절반은 신입생들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여기서 지낸 지 3-4년이 넘는 고학년 터줏대감들이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3년씩이나 살 수 있을까, 개인 화장실도 없고 에어컨도 없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캐나다인들은 그런 것에 불평을 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세상에서 한국사람들이 제일 몸 편한 걸 따지는 것 같다. 캠핑을 갈 때도 하루 자는 거 편하게 있겠다고 온갖 장비들을 다 지고 간다.


기숙사에는 이상한 전통들이 많았다. 학교의 전통이란 건 이상하게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올 뿐이지만 생각보다 세밀하고 복잡하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은 의외로 한국 사람들보다 전통을 중시한다. 그러한 전통을 지키는 것에서 소속감과 자긍심을 느끼기도 한다. 무언가가 고장 나지 않으면 굳이 바꾸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새것과 편한 것을 좋아하고 10년 전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이상한 전통들 중 하나는 신입생 신고식이었다. 흔히들 서양은 개인의 존엄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야만적인 행동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다 비슷비슷하다.


매년 신고식의 진행을 담당하는 선배들이 따로 있다. 몇십 년 동안 자원자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었다. 우리 기숙사는 역사가 짧은 편에 속하지만 영국의 경우에는 이런 신고식이 몇백 년 동안 이어지는 곳도 있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약간씩 순화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큰 틀은 비슷하다.  선배들은 신고식 날 아침에 신입생들에게 언질을 준다.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있을 테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하지만 자정이 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학생들은 '잊어먹었나...' 하면서 다들 막 잠에 들 무렵, 새벽에 복면을 한 무리들이 방문을 두들기면서 마스터 키로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당장 튀어나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모두 1층의 회합실로 끌려갔다. 다들 잠옷 차림이었다. 리더 역할을 맡은 선배가 '쓰레기 같은 너희들이 이 유구한 역사의 기숙사에 들어왔다는 건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나같이 병신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기강을 잡았다. 신입생 하나하나를 호명하면 가운데로 나와서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노래를 부르라고 시키거나 재롱을 피워보라고 하기도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내가 말을 잘 못 알아듣자 "영어도 못하는 놈이 뭐 하러 대학은 왔어! 어느 나라에서 온 놈이야?" 하면서 비웃기 시작했다. 나는 옛날부터 이런 걸 아주 혐오했다. 그리고 나는 객관적으로 보면 사회성이 조금 모자란 찐따였기 때문에 대답도 어버버 했고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잠깐 마음속으로 옆 부엌에서 과도라도 가져와서 찔러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토론토에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누가 몰아붙일 때 가끔씩 뭔가 사고를 쳤기 때문에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진행자들은 눈치를 챘는지 나에게 그만 들어가라고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이런 학대를 마치 놀이처럼 즐기며 호응하는 신입생들도 많았다. 나는 그때 그동안 내가 인간사회에 대해서 뭔가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고식이 끝나고 우리는 넓게 깔린 비닐 위에 죄수처럼 올라섰다. 곧이어 우리 위로 겨자와 케첩이 뿌려졌다. 한 열 통은 넘게 썼을 것이다. 그리고 밀가루도 뿌렸던 것 같다. 우리는 부침개 반죽처럼 보였다. 나는 그 와중에도 이 비싼 케첩을 이렇게 막 쓰면 엄마한테 혼날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섰다. 우리 집에서는 케첩을 아끼겠다고 항상 케첩통을 한 번만 눌렀다. 음식을 가지고 장난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4인 1조를 짜서 동이 틀 때까지 밖에 나가서 서너 개의 미션을 수행해야 했다.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다는 생각나지 않고, 캠퍼스 어딘가의 동상 밑 글귀를 외워오는 것과 편의점에 가서 바셀린, 바나나, 콘돔을 사 와야 했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기숙사로 들어왔다.


역사가 오래된 기숙사들은 다들 그런 식의 전통이 있었다. 옆 트리니티 칼리지의 경우 눈가리개를 하고 차를 태워서 토론토 외곽 시골길 아무 데나 던져놓고 기숙사까지 찾아오게 하기도 했다. 우리 기숙사도 예전에는 비슷한 걸 했으나 사고가 날 위험이 많아 몇 년 전부터 금지되었다고 한다.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학교 당국도 그런 정도는 눈감아 주는 분위기였으나 지금 같은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아직도 신고식이란 게 존재하고 있을지는 모른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기숙사의 신고식은 한국에서 중학교 때 극기훈련장에서 조교들에게 당했던 얼차려와는 약간 달랐다. 우선 구타가 없었다. 고통스러운 자세를 하도록 강요하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날 기숙사를 나가서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신고식 며칠 전부터 날짜까지 말해주면서 너스레를 떨었던 것이다. 이런 게 마음에 들지 않음 그날 다른 데서 하룻밤 자고 오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생들에게 일반 성인의 신사도를 기대하면 안 된다. 내가 들어오기 전년도에는 한국인 2세 학생이 내가 살던 방에서 지냈었다. 이후에도 기숙사에 여러 번 놀러 왔었기 때문에 나와 이야기도 자주 했었다. 밴쿠버에서 막 와서 토론토의 물정을 모르는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세상 물정을 모르고 눈치가 없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당연히 그는 놀림거리가 되었다. 그는 젊은 남자 답지 않게 음란물을 혐오했었는데, 그런 걸 보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애 같은 소리를 종종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지냈던 방은 2차 대전 당시 캐나다의 수상이었던 Lester B. Pearson 이 신입생 시절 살던 곳이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토론토 국제공항이 그의 이름을 기념해서 피어슨 공항으로 불린다. 그는 학생 때 상당한 찐따였기 때문에 종종 다른 사람들이 장난을 많이 쳤고, 그 후 그가 살던 방의 학생에게는 3월 중순에 골탕을 먹이는 전통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3월의 어느 날 학생들은 그 한인 2세가 외출한 틈을 타서 문을 따고 들어와 음란물을 혐오하는 그의 소지품 곳곳에 음란잡지에서 오려낸 남자의 성기 사진들을 여기저기 감추어 놓았다. 그는 그 이후 몇 달 동안 외투의 주머니를 뒤지거나 소지품을 열 때마다 성기 사진들이 너풀너풀 떨어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하루는 그가 교회에서 일어나 성경을 펼치자 책갈피에 끼워져 있던 성기 사진이 앞 의자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누가 이딴 짓을 했냐고 폭발했지만 아무도 자기가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고식 때 제일 소리를 많이 지르던 기숙사 선배가 다음날 나에게 와서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그다지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고 말했고, 선배는 사실 이런 건 전통도 있지만 이제 같은 식구니까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단합 차원에서 하는 거라면서 앞으로 혹시 선을 넘는다고 생각한다면 꼭 이야기하라고 당부를 했다. 그쪽 입장에서도 또라이 신입을 무시하다가 칼침 맞는 것보다 좋은 말 한마디라도 해두는 것이 나을 일이지만 그렇게 와서 말해주는 것과 그냥 모른 척하거나 왜 겉도냐고 윽박지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동안 나는 다른 이민자들보다 주류사회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나, 기숙사에서 캐나다인들과 부대끼면서 살게 되면서 그동안 내가 몰랐던 것이 아주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에는 같이 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토론토로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