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런인생 Aug 06. 2024

토론토로 가다

1994

환경을 바꾸면 운이 트인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민을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데서 이런 일이나 하면서 썩을 사람이 아닌데. 노는 물을 바꾸면 인생을 팍팍 치고 나갈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작 본인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실 주변 환경을 바꾸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한국보다 이직이 쉬운 이곳에서도 같은 회사에 십수 년씩 다니는 사람들에게 왜 옮기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만 결국에는 현재가 견딜 만하고 불확실한 미래가 싫어서이다. 모르는 곳에서 150원을 받을 가능성에 베팅하기보다는 지금 회사에서 100원을 받는 것을 선택한다. 마찬가지로 결혼생활을 오래 유지하는 사람들이 이혼하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이혼은 하고 싶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될지 몰라서 몇십 년을 우물쭈물거리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현재의 상황이 항상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난다.


나도 집이 좋았다면 밴쿠버에 있는 대학을 갔을 것이다. 토론토에서 대학을 다니면 많은 것이 바뀌리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정신 좀 차려서 기초만 잘 잡으면 되겠지. 고등학교 내내 우등생 소리를 듣던 내가 아닌가. 대학이라고 그래도 그게 그거지. 운 좋게 토론토에서 직장이라도 잡으면 자연스럽게 지긋지긋한 집구석과는 영영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저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지지고 볶게 놔두면 나의 인생도 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입학을 앞둔 나에게 본인은 대학교 4년 내내 놀았어도 아무 문제없었다면서 대학을 가면 공부보다 여자도 사귀고 인맥도 넓히고 여기저기 놀러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1968년의 한국 서울대나 1994년의 캐나다 토론토대나 그게 그거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아버지처럼 대체로 너무 낙관적인 경향이 있었다. 토론토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면 간섭하는 부모도 없으니 여자친구도 금방 생길 것이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 미래를 가로막는 건 발목을 잡는 짐덩어리 같은 가족들과 내 역량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주지 않는 좁디좁은 밴쿠버 바닥이었다. 30대가 되자 나는 60대가 될 때까지 남의 탓만 하는 아버지를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면서 내가 틀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


이민 올 때 가져온 바퀴 달린 이민가방에 짐을 쑤셔 넣고 비행기를 탔을 때만 해도 생판 모르는 동네에서 사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약간 꺼림칙하긴 했으나 가족과 집에서 계속 살면서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집에서 살면서 매일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와 형의 짐승같은 울부짖음을 배경소음으로 삼을 바에야 그냥 일찍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 죽음도 크게 보면 주변환경의 변화에 속한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일 년 후의 일도 계획해 본 적이 없다. 그전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죽음은 아주 스케일이 큰 이민 같은 것이다. 


꽤 오랫동안 나는 삼십 살까지 살면 충분히 살았으니 그때쯤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서 죽을 것이라는 아무 근거도 없는 믿음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삼십 세 생일이 되던 날 밤 나는 누워서 이상하다, 왜 아직도 살아있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그때 죽지 않고 살아있기를 잘했지?'라고 묻겠지만 딱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삼십 세를 넘긴 지 18년이 넘었지만, 그동안의 인생경험 중에서 '그래, 죽지 않고 이걸 해본 건 다행이야' 할만한 기억은 없다. 애시당초 죽으면 기억이란 건 없어진다. 모든 즐거웠던 기억들은 단지 그 순간뿐이다. 우리가 행복을 찾는 이유는 그 순간을 위한 것이지 죽은 뒤 나의 인생 성적표 때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면서도 오래 살기를 원하고 되도록이면 많은 즐거운 경험을 하려고 한다. "이것도 못해보고 죽으면 억울하잖아?"라고 말할 때 그들은 자신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죽고 나면 억울함이란 걸 느낄 "나"라는 존재는 없어진다. 10살이건 90살이건 죽고 나면 억울함이나 원통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겉으로는 서구화된 것 같이 보여도 무의식적으로는 다들 무속의 추종자들이다. 이를테면 죽으면 귀신이 되어 오랜 시간 구천을 떠돌면서 살아생전의 인생에 대해 후회할 거라는 식이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더더욱 모순적이다. 죽으면 주님과 낙원에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떠들면서도 이 힘든 이승에서의 백세인생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


떠나는 날 온 가족이 나를 배웅하러 공항에 같이 갔다. 어머니는 멀리 떠나는 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고 나는 손을 흔드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떠났다. 4개월 후 크리스마스 방학 때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 당시는 비행기로 다섯 시간 걸리는 곳은 아주 먼 곳이었고 4개월은 아주 긴 시간이었다. 지금은 일 년이 화살처럼 지나간다. 작년에 만난 친구들을 일 년 후에 또 보게 되면 "요새 자주 본다" 하는 소리를 듣는다. 늙으면 시간이 빨리 간다.


당시 장거리 국내선은 지금과 달리 편의시설이 좋았다. 좌석도 넓었고 음료와 식사도 섭섭하지 않게 줬다. 지금은 고속버스보다 나을 게 없는 싸구려지만 이는 지난 수십 년간 아주 천천히 진행된 일이다. 스튜어디스가 주는 식사를 먹으니 왠지 대단한 인물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민 온 이후로 비행기는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 


토론토 공항에 내렸을 때는 거의 해가 질 무렵이었다. 택시를 타고 종이에 적힌 주소를 보여주었다. 택시는 40분 정도 달려서 다운타운 한가운데에 날 내려놓았다. 역시 토론토는 밴쿠버보다는 상대도 되지 않게 큰 도시였다. 그런데 택시가 내려다 주긴 했으나 건물들 앞에는 주소가 쓰여 있지 않아 기숙사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린 곳 근처에는 현대식 아파트와 이백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벽돌 건물이 나란히 있었다. 설마 토론토 대학인데 이런 낡은 건물에 기숙사가 있으려구. 나는 현대식 건물이 기숙사라고 생각했고 출입구를 찾아서 두리번거렸지만 그곳은 기숙사가 아니었다. 왔던 자리로 되돌아가니 신입생은 저쪽에서 수속을 하라는 입간판이 그제야 보였다. 수속을 받아주는 직원이 자기도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2학년 학생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직원은 미인이었고 친절했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하다. 아직 진상들을 많이 만나보지 못해서 그렇다. 우리는 그 후로도 마주칠 때마다 종종 수다를 떨었다.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들고 가리켜 준 건물에 들어서자 키가 아주 큰 백인이 자기가 이 하우스 사감이라면서 인사를 했다. 영문과 대학원생이었고 기숙사비를 면제해 주는 조건으로 사감 업무도 같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내 방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룸메이트가 먼저 와서 짐을 풀어놓고 있었다. 정말 공부만 하게 생긴 백인이었다. 자기는 토론토에서 이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도시에서 왔는데 통학하기 귀찮아서 기숙사에 들어왔다고 했다. 라디에이터가 유리창 아래 있고 양쪽 벽으로 책상과 책장, 싱글침대가 있는 한 다섯 평짜리 방이었다. 방의 천정은 아주 높았고 첫 느낌은 마치 감옥 같은 곳이었다. 지어진 지 백 년이 넘었지만 방의 내부는 거의 바뀐 적이 없다고 했다. 기숙사에는 층마다 공용 화장실이 있고, 통금시간 같은 건 없지만 지켜야 할 규칙은 몇 가지 있었다. 기물을 부수면 안 된다던지 방에서 마약을 하면 안 된다던지 그런 것들이었다. "배고픈데 밥은 어디서 주나요?" 하고 물어보자 식당은 6시 반에 문을 닫기 때문에 지금은 늦었다는 것이었다. 남과 같이 일 년 동안 한 방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과 화장실을 남들과 같이 써야 한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걸렸다. 기숙사를 소개하는 서류에 이미 다 명시되었을 것이지만 나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내맘대로 내가 살게 될 곳은 깨끗하고 호화로운 곳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왠지 토론토에서의 생활도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룸메이트와 대충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잘 왔어요." "그래 다행이다 또 연락해라." 그때는 시외전화가 분당 1달러였기 때문에 용건만 간단히 이야기하고 서둘러 끊어야 했다. 나는 불빛이 많이 보이는 쪽으로 걸어갔고 그곳은 다행히 Yonge Street라는 번화가였다. 두리번거리다 맥도널드를 찾아 들어가 식사를 했다. 늦은 시간이라 매장 안에는 노숙자 몇몇이 자리를 잡고 있었을 뿐 조용했다. 늦은 시간이라 헌책방 외에는 열려 있는 가게들이 없었고 책방 안에는 철 지난 음란 잡지들을 고르는 중늙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여기는 저런 것도 중고로 판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참 방황하다가 기숙사로 돌아가면서 내일은 동네 구경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 걸렸다. 침대에는 매트리스밖에 없었고 침구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건 집에서 가져와야 헸으나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내일은 오다가 봐 둔 백화점에서 이불이랑 베개를 사야겠구나 생각하며 가져온 옷을 덮고 잠을 잤다.

매거진의 이전글 1994년은 매우 분주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