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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Sep 30. 2022

짝, 그 후

1988년

당시에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싫어도 남자가 계속 들이대면 여자가 끝내는 마음을 연다는 것이다. 사실 그랬다.  많은 드라마와 소설이 이 구도를 사용했다.  무례하고 시끄러운 남자가 계속 좋다고 쫓아다니는데 여자는 처음에는 싫지만 그러다가 남자가 안 보이면 뭔가 섭섭하고, 그 와중에 남자가 깡패를 물리쳐 준다던지 신장이식을 해준다던지 뭐 그런 한 방을 딱 선사하면 여자의 마음이 돌아서서 애정이 싹튼다...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싫다는데도 계속 들러붙는 것은 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B가 확실히 싫다는 표현을 했다면 나는 더 이상 B를 귀찮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나에게 "한번 튕겼다고 남자가 돼 가지고..."라고 말하는 여자들도 몇 있었다)  나는 확실한 것을 좋아해서 여자가 단호하게 "싫다" 아니면 "좋다" 말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사에 오해의 여지 없이 확실한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싫다면 세상은 넓으니 시간 버리지 말고 다른 데를 알아봐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B의 반응은... 언제나 뭔가 모호했다.  선물을 주면 받았고, 아침에 등교하면 말을 걸었으며, 한번은 내가 언젠가 제안했던 "방과후 같이 공부하기"를 왜 말만 하고 안 하냐고 타박했다.  나는 속으로 이상하다, 분명히 그때는 내가 너랑 공부를 왜 같이 하냐라고 비웃었는데...라고 생각했지만 말이 길어지면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서 별 대꾸는 하지 않았다.  B의 생일날 나는 큰 맘을 먹고 선물을 전해주려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마침 생일파티를 하던 B과 우리 반 여자아이들 네댓 명이 우르르 나와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B는 선물을 받더니 얼른 문을 닫았고 문 뒤에서는 "들어오라고 그러지..."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어느 날 내 뒤에 앉아 있던 심하게 비만이었던 친구가 커터칼을 가지고 나에게 장난을 쳤다.  나는 칼을 유난히 무서워했는데, 그게 재미있던 친구는 갑자기 내 얼굴 근처에서 칼을 휘둘렀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으로 막았고, 잠깐 아팠는데, 갑자기 피가 많이 났고, 벌어진 상처 사이로 뼈가 보였던 게 기억난다.  양호 선생님은 택시를 같이 타고 근처 정형외과로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손이 피범벅이 되자 친구는 사색이 되었고 나는 뭐라고 그랬더라... 돼지새끼가 이런 건 더럽게 빠르네 했던 거 같다.  치료받고 집으로 왔는데 반장이 찾아왔다, 선생님이 찾으시니 지금 당장 학교로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담임은 넌 예의가 바른 학생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치료받고 선생님께 보고도 안 하고 그냥 집에 갈 수가 있냐,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그러더니 가보라고 했다.  그 말을 하려고 날 학교로 다시 불렀나 싶었지만 미친놈의 정신세계는 알면 알려고 할수록 다치기 쉽다.  칼잡이 친구는 그다음 날 자기 엄마가 전해드리라 했다며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3만 원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네 위자료니 네가 알아서 써라 했고 난 손이 아물자 곧 그 3만 원을 오락실에서 탕진했다.  그는 훗날 의대에 들어가서 산부인과를 전공했다고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칼솜씨라면 임산부의 커다란 배를 가르는 건 그에게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B는 아프냐, 괜찮냐,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꿰맨 상처를 구경하고 싶대서 보여줬더니 징그럽다며 탄성을 지르고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 반에서 B와 친한 아이는 많지 않았고, B는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B를 싫어하는 이유는 B를 제외한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B는 악의는 없었지만 아무 말이나 눈치없이 해댔고 자존심이 매우 세서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겨울방학 전날 우리는 미술시간에 만든 성탄카드를 교환했다.  받은 카드의 개수는 인기의 척도였고 나는 그럭저럭 나와 가까운 곳에 앉은 아이들에게 섭섭지 않은 수의 카드를 받았다.  물론 B에게도 카드를 주었지만 그 애가 나에게 뭘 주는 적은 없었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B가 만들다 망친 게 남았다며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뭘 해도 절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을 하는 적이 없는 B 였다.  


집에 와서 꺼낸 카드는 검은 마분지에 촛농을 하나하나 떨어뜨려 밤에 눈이 내리는 풍경이었고, 안에는 흰 수정액으로 빽빽하게 글씨가 써져 있었다.  수정액으로 글씨를 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을 버리면서 쓴 내용은 너 나를 좋아한다면서 놀리는데, 내가 속을 줄 아느냐, 내가 이 카드 안 주려다 주는 거다, 남을 바보 만들면 기분이 좋냐 뭐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황당했다.  이것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  근데 이런 얘기나 하려고 이 비싼 수정액 - 당시 펜텔 수정액 하나는 3000원 정도였다 -으로 글씨를 쓰는 건 무슨 심보였을까.  그리고 망친 카드라는데 왜 내 눈에는 멀쩡해 보일까도 궁금했지만 하튼 버리려다 준 거니까 나도 받아서 그닥 기뻐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고 얼마 뒤 찢어버렸다.  B는 뭔가 이상한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6학년이 거의 끝나가던 날 우리는 중학교 배정을 받았다. 나는 집 바로 뒤 서일중학교였고 B는 서초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걱정하는 척하면서 남을 먹이기 좋아하던 반 친구가  "어머 둘이 다른 데 됐구나 어떡해..." 하며 불쌍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B는 "나는 좋은데?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때 뭔가 나는 사람을 잘못 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인사치레로나마 그래 가서 잘 지내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B가 혐오스러워졌다. 앞으로 더 이상 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저런 애는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0여 년 후 아이러브스쿨이라는 동창 찾기 사이트가 대히트를 쳤고, 6학년 동창들과 연락이 닿기 시작했다.  나는 캐나다에 있으니 만날 일은 없었지만 몇몇과는 이메일도 주고받았다.  그중 하나는 B 였다. B는 외고를 졸업하고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다.  B에게 나는 안부 이메일을 보냈고 예상과는 달리 B는 답장을 꼬박꼬박 했다.  대부분은 별 시답잖은 이야기였는데, 한번은 내가 국민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자 당시 자신은 나 때문에 매우 힘들었으니 그 얘기는 하지 말라고 정색하는 답신이 왔다.  나는 사과했고 그 후로는 한동안 메일을 보내지 않았는데, 그러자 무슨 일이 있냐고 다시 연락이 왔다.  웬지 우리 둘 다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내가 한국에 갈 일이 생겼다. B는 잘 됐다며 동창들과 다 같이 만나자고 했고 나도 아이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던 차라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는 2001년 겨울 당시 동아극장 (지금의 강남역 CGV)에서 만났는데, 분위기가 무언가 이상했다.  친구들 앞의 B는 이메일 속의 B와는 달리 나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고 데면데면했다. 말을 걸어도 대답도 건성이었다.  누가 보면 내가 졸라서 억지로 나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들끼리도 분위기가 냉랭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뭔가 작은 다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괜히 왔다고 생각한 나는 그들과 카페에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 시간을 내 준 답례로 계산을 하고 작별했다. 내가 계산을 하자 그제서야 친구들은 표정이 밝아지더니 나에게 이것저것 말을 했다.  얘네들이 원래 이렇게 궁상맞은 인간들이었던가. 캐나다로 돌아오자 B의 메일이 왔다, "그때는 좀 분위기가 그랬지? 미안하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 한국 방문한 이유는 사실 네 친구 누구누구와 사귀는 중인데 걔 보러 갔었던 거라고 밝혔다. B에게서는 더 이상 메일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일 년 후 아직 한국에 있던 지금의 아내가 말하기를 B가 지금 북미 배낭여행 중인데, 토론토에 이틀 동안 있을 테니 만나서 밥이라도 사주라는 것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러겠다고 해도 뜯어말리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싶었지만 B의 근황이 궁금한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 B를 데리러 갔다. B는 여행 중 만난 사람이 아는 남자가 사는 아파트에 묵고 있었다. B는 나를 만나자 어제 본 사람처럼 두런두런 자기 이야기를 했다. 요새 그리스에 꽂혀 있는데 혹시 토론토에 그리스 동네가 어딘지 아냐고 했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B를 태우고 한참 달리던 Danforth 거리가 바로 그리스 동네였다는 건 몇년 후에 알게 되었다.  지금 묵는 곳의 주인 남자애가 재워주는 댓가로 어젯밤 자기 방에 들어와서 자겠다고 그래서 실랑이가 좀 있었다는 말도 했다.  나는 그동안 B가 닳고닳은 인생을 산 것인지 아니면 예전처럼 눈치가 없어서 그런건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뉴욕을 간다는 말을 듣고 북미의 고속버스에 어떤 사람들이 타는지 알고 있던 나는 얘가 과연 한국에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도 의문이 들었다. 밥을 먹다가 B는 결혼 승낙은 쉬웠냐고 물었고 그렇지는 않았다고 하자 그녀는 왜? 조건이 딸려서? 하고 캐물었다.  나는 처음으로 B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그러자 B는 당황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하여튼 나는 B를 데리고 내가 아는 식당 중 제일 괜찮은 곳에 들어가서 밥을 먹이고 편의점에 들러서 간식을 이것저것 집어서 들려 보냈다. B는 예나 지금이나 절대로 고맙단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B가 측은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차에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식당에 스카프를 놓고 온 걸 알아차렸다.  비싼 거냐고 묻자 그런 건 아닌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럼 그냥 잊어버려. 하고 운전을 계속하자 그래도 맘에 드는 거였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그럼 다시 가서 찾아? 하고 묻자 아니라고 했다.  세 블록쯤 지나자 그거 사실 꼭 갖고 싶었던 건데... 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B는 항상 그렇게 매사에 모호했다.  진작 얘기했으면 벌써 찾아왔지! 두 번째로 신경질을 내고 식당으로 다시 가자 스카프는 다행히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시간을 놓칠까 봐 나는 전전긍긍했지만 다행히 버스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게 내가 B를 본 마지막이었다.  내가 결혼할 때 아내는 B에게도 청첩장을 보냈지만 오지 않았다.  동창들이 보는 프리챌 게시판에는 회사에서 졸다가 시간을 놓쳤다는 이상한 변명을 올렸다.


B는 좋은 외국계 직장에 들어가서 그녀의 어머니는 항상 딸 자랑을 했고, 아주 대단한 사람들과 매주 선을 본다고 들었다.  하긴 B 정도의 외모나 스펙이면 남자들이 줄을 길게 섰을 것이다.  그러나 어릴 적 내 바램대로 B는 결국 아무와도 이어지지 않았고 46세가 된 지금도 34년 전 그 동네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십여 년 전에 아내가 한국에 갔을 때 B를 만났는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일 세상이 멸망할 것 같지 않니."  하지만 곧이어 자기가 60만 원짜리 피부관리를 받았는데 아주 좋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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