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992년 10월 28일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으로 그 자리에서 들려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장림 목사라는 사람이 다미 선교회라는 조직을 세우고 미래를 본다는 청소년 예언자들을 데리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하면서 종말론 전도활동을 했었는데,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서 어마어마한 수의 추종자들이 생겨나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장림은 다미 선교회를 설립하기 수년 전에 미국의 기독교 소설 "휴거"를 번역했었는데, 그 소설의 내용도 거의 유사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사라져서 비행기가 추락하고 자동차가 강에 빠지고 하는 일이 생기고, 그 이후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권력을 잡고 이후 세상에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재난이 차례차례 일어나는 그런 아주 흥미진진한 스토리여서 나도 우리 집에 있는 그 낡은 책을 심심하면 들춰보곤 했다. 언젠가 이런 대재앙이 일어나서 지구에서 사람들이 싹쓸이당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할 때마다 뭔가 설레곤 했다.
다미 선교회가 그 세력을 떨친 건 90년대 들어서이지만, 그 이전에도 이장림 목사와 친분이 두터운 "권사님들" 이 소규모 조직으로 활동했었다. 그들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방법은 간단하다. 병에 걸린 사람은 마귀가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 그 사람을 붙잡고 찬송을 부르면서 매우 때리면 마귀가 견딜 수 없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안찰"이라고 불렀다. 그냥 기도만 하면 되지 왜 때릴까? 싶겠지만 마귀란 건 아주 독해서 몸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기도와 찬송을 하면서 때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기독교와 무속신앙의 절묘한 하이브리드이지만, 이 논리에 설득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중에는 우리 부모님도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대학을 나오셨고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KS 라인이셨다. 그러나 그런 건 사실 사기를 당하느냐 마느냐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게다가 당시는 초자연, 심령, 귀신, 이런 현상들이 쉽게 엉터리라고 치부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으셔서 우리 집에는 찰스 베를릿츠라는 미스터리 현상 전문 기자가 쓴 책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틈이 나면 비행기와 선박이 사라진다는 미국의 버뮤다 트라이앵글과 일본 남쪽의 악마의 트라이앵글, 배들이 일단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공포의 사르가소 해, 플라톤이 말했다는 심해의 아틀란티스 도시, 미국 해군이 순간이동을 목격한 필라델피아 실험, 외계인이 추락한 로즈웰 공군기지, 포나페 섬에 있는 난마톨이라는 저주받은 고대 인공섬, 페루의 미스터리 도시 마추픽추, 사람의 심장을 날것으로 씹어 먹는다는 고로크족이 사는 아무네 마친 이라는 지상 최고의 산, 이스터 섬의 모아이, 호주의 식인 개미, 아마존 정글 속의 황금도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나는 언젠가 혼자 집을 몰래 떠나 그런 곳들을 탐험하는 게 꿈이었고, 내 책상 밑에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가방이 챙겨져 있었다. 어디로 가던지 집에 있는 것 보다는 행복할 것 같았다.
우리 집에는 "1999년 7월"이라는 책도 있었는데, 그 책에 따르면 1999년 7월에 하늘에서부터 공포의 대왕이 내려와서 지구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기근이 닥쳐서 식량이 부족해질 테니 지금부터 훌륭한 영양분을 가진 구더기를 먹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그 책의 제본이 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내가 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은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며 나를 타박했다. 내가 언젠가 H에게 나의 꿈은 백 투 더 퓨쳐에 나오는 브라운 박사처럼 타임머신을 만드는 거라고 하자 H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은 뭐해서 먹고 사는지 모르겠으니 그런 꿈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했다. H 처럼 착하지 않았던 B는 나에게 병신같은 소리좀 하지 말라고 비웃었다. 여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굉장히 현실적이다. 나는 대기근이 와도 B에게는 구더기를 나누어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모두가 공평하게 멸망하는 종말은 사실 그렇게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나 혼자 죽으면 억울하겠지만 전 인류가 박살이 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될 수도 있다.
부모님이 형이 자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형이 국민학교를 입학하고도 몇 년 지나서였는데, 그전까지는 그냥 좀 유별나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무언가 많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잘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게 나쁜 소식일 때는 더욱 그렇다. 형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크게 중얼거렸고 손을 마구 흔들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나 한테 가서 냄새를 맡거나 혼잣말을 했다. 아주 간단한 대화 이외에는 소통이 불가능했지만, 평소에 아이들에게서 "네 알았어요" 혹은 " 오늘은 길에서 강아지를 보았어요" 이상의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부모님은 이 사실을 늦게 알아차렸다. 학교에서는 간혹 매를 맞고 왔고 형은 그럴 때마다 똑같은 말을 수십 번씩 하면서 손을 입에 대고 계속 흔들었다. 그 당시는 자폐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정신질환을 치료한다는 개념도 없었다. 정신병원은 그냥 사람들은 가두고 두들겨 패는 곳이라고 생각했고, 자폐증 아이를 둔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의 형제자매에게 보호자 노릇을 시켰다. 우리 학교의 어떤 여자아이는 자폐인 언니가 있었는데, 그 부모는 학교에 부탁해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둘 다 계속 같은 반에 있도록 했다. 나는 그 동생이 웃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언니는 툭하면 아이들에게 돌을 던지고 이상한 욕을 해대서 아이들이 모두 피해 다녔다. 나는 둘이 자매인 줄 몰랐으므로 왜 저 둘은 학교에서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집에 같이 가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형제는 피를 나눈 사이이니 항상 우애 좋게 지내고 콩 반쪽도 나눠먹어야 된다고 했다. 말이야 그럴싸 하지만 그건 한쪽만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다. 어쩌다 남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되면 자식들이 가지 않음 콩가루 집안처럼 보일까 봐 꼭 온 가족을 끌고 가서 그 집 아이들이 있는 방에 형과 나를 밀어 넣고 알아서 잘 놀라고 했다. 나는 "너네 형은 왜 그러니"라는 질문을 매번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주로 무시와 회피였다. 특수학교를 보낸다던지 의사와 상담한다던지 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었지만 꾸역꾸역 등교를 시켰다. 학교에서 뭘 배워오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남들처럼 학교에 책가방 메고 다니는 모습이다. 형이 배치고사가 0점이 나와서 일반고등학교도 못 가게 됐을 때 선생과 상의해서 보낸 곳이 리라공고였다. 90년대의 공고는 강한 자만 살아남는 곳이었다. 이상한 자폐학생 따위를 좋게 볼 선생이나 학생은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폐건 뭐건 자신이 옆에 붙어서 계속 윽박지르고 가르치면 학교 수업을 따라갈 거라고 생각했다. 수년 동안 몽둥이가 여러 대 부러졌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사실 그게 그 당시 부모들의 인식이었다.
옛날이 더 좋았고 어쩌고 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상당히 편하게 산 사람들이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보다 미개했고 미래인이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경악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지금 꼰대들은 옛날 학생들은 인성이 지금 아이들보다 훌륭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법이니 인권 따위 다 없애고 매타작을 해댄다면 요새 애들이라면 까짓 인성 따위야 쉽게 흉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큰 외삼촌이 어머니에게 "신령한 능력을 가진 권사님들" 얘기를 꺼냈다. 큰 외삼촌은 외가 친척들이 그렇든 원래 좀 광신도 기질이 있어서 방언, 은사, 뭐 이런 거 있다는 부흥사들을 자주 쫓아다녔었다. 이 권사님들은 병도 고치고 특히 귀신을 쫓아내는 데 큰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형 속에 있는 귀신이 나가면 우리 집을 둘러싸고 있는 먹구름은 일시에 걷힐 것이었다. 큰오빠가 그렇다니 사실일 거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경기도 어디 짓다 만 것 같은 기도원으로 외삼촌네와 같이 갔다. 나는 물론 가기 싫었고 이거 다 사이비들의 개수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언급했다시피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