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기도원은 구불거리는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냥 폐교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예배당 본당 주위로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1층짜리 시멘트 건물들이 너댓 동이 지어져 있었는데, 국민학생인 내가 봐도 그렇게 호화로운 곳은 아니었다. 어떤 곳은 그냥 맨 시멘트 벽이었고, 내부는 곰팡내가 나고 어두컴컴했다. 화장실은 대부분 재래식이었고 사람들은 마당 근처의 공동 수도에서 세수를 하거나 물을 길었다.
외삼촌 네와 어머니는 뭐에 홀려서 이런 거지 같은 곳까지 차를 타고 왔을까 싶었지만 그분들은 나와 달리 여기서 큰 은혜를 체험할 기대에 차 계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온갖 종류의 또라이들은 다 만나봤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거기서 2박 3일을 보내고 나서 나의 견문이 매우 짧았음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그 "권사님들" 을 만났다. 권사님들은 우리 집안 얘기를 대충 들으시고는 주여 주여를 몇 번 연발하시더니 번쩍이는 안광으로 형과 나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다들 성령의 은혜가 너무 부족해서 마귀가 장난을 치는 것이니 다 같이 예수님께 합심해서 이 천한 죄인들을 구해 달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그 권사님들은 양손을 들어 기도하면서 무언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도 중얼거렸는데 사람들은 그게 방언이라고 했다. 능력을 받으면 그렇게 이상한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온다는 것이었다. 20년 뒤 나는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치른 "빵상 아줌마" 도 그분들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고 뭔가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기도원에서 주는 저녁을 먹고 나니 예배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예배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는 벌써 사람들이 빽빽이 차 있었다. 그만큼 많은 수의 미친놈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나는 그 후에도 본 적이 없다.
예배는 찬송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반주 소리가 좀 크다 싶었지만 이내 사람들의 절규하는 듯한 노랫소리에 녹아들어 갔다. 찬송은 할렐루야가 한 여덟 번 나오는 복음성가였다.
그걸 열 번을 불렀다.
그다음에는 후렴이 속히 오시옵소서인가 하는 복음성가를 다시 열 번을 불렀다.
박수도 치게 했다.
비트도 점점 빨라졌다. 처음부터 양손을 들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초짜다. 나중에 가면 팔이 아프기 때문이다. 프로들은 한 30분 지나면 비트에 맞춰 춤을 춘다. 박수도 친다. 중간에 "주여!" 혹은 "할렐루야!" 하면서 고함도 지른다.
위의 과정을 한 네 번 반복한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실내가 그렇게 더워지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다들 무아지경에 빠져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를 불렀다. 중간에 고함도 간간이 들렸고, 아주머니들은 몇몇 엎드려 흐느끼기도 했다. 나중에는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의 크신 은혜를 감당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나고 부흥사가 올라가서 설교를 했다. 자세한 내용은 지루해서 대부분 까먹었는데, 추임새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믿쓥니다!" "쭈시옵소서!" "할렐루야!" 등등이었다. 대충 요지는 지금이 세상 말세이며 믿는 자들은 곧 환난을 피해서 들려 올라갈 거라고 했다. 예배당 안은 숨 막힐 듯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알전구들은 번쩍였고, 사람들은 울부짖거나 중얼거리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배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나는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인생이 안 풀리면 이런 데 와서 꽥꽥거리고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외삼촌은 사업이 망해서, 어머니는 골칫덩어리 아들 때문에 이런 데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는 것이다. 현대 물질문명이 사람들을 피폐하게 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지금 당장 스마트폰이 사라진다면 유튜브 보는 대신에 기도원 들어가서 울부짖을 사람들은 차고 넘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덕에 그나마 열 번 걸릴 사기를 다섯 번 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질문명의 대안이 그렇게 신통한 것들만 있는 건 아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권사님들과 방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권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악한 영이 우리 가족들 몸 안에 들어가 있는데, 이 영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안찰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러우니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하지 않겠노라고 하셨다.
안찰이란 것은,
옷을 속옷만 남기고 남김없이 벗는다.
4명이 양 팔 다리를 한쪽씩 꽉 붙잡고 있는다.
두 명이 기도와 찬송을 하면서 손으로 가슴 아래부터 발까지 맨손으로 철썩철썩 소리가 나도록 친다.
이것을 4~6시간 동안 진행한다.
안찰을 받는 사람은 제아무리 맷집이 좋아도 한 30분 정도가 지나면 고통에 몸부림치게 된다. 이때 팔다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불쌍해 보일지라도 절대 빠져나갈 여지를 주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찬송과 기도를 소리 높여 불러야 한다. 절대 끝나지 않을 거 같았던 구타... 아니 안찰이 끝나면 온몸이 뱀을 휘감은 것처럼 검붉은 멍 자국이 남는다. 권사님들은 이것이 사람 속에 있는 악한 영, 즉 뱀이 밖으로 나오는 과정이라고 했다. 안찰을 받은 사람은 하루 정도는 밥을 먹지 못한다. 물만 겨우 마시다 죽을 먹고 그다음에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사흘 남짓이다. 재미있는 것은 며칠 지나면 온몸에 검푸른 멍이 들지만, 배꼽 아래의 멍은 노랗고 밝은 파란색이다. 그 기도원 여기저기에는 안찰을 받고 겨우 숨만 헐떡거리면서 누워 있는 사람들도 여기저기 있었고, 시퍼런 멍 자국이 온몸에 난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후의 기억은 좀 확실하지 않다. 외삼촌 가족 모두가 안찰을 받는 광경은 기억나지만 거기가 어디였는지는 잘 모른다. 그때는 여름방학이었고, 내가 난리를 피워서 외삼촌이 근처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줬고, 나는 반포 고속 터미널에서 서초동 우리 집까지 걸어갔다. 미친놈들 소굴에서 겨우 도망쳐 왔구나 하는 생각과 혹시 그놈들이 정말로 선지자들이라면 어쩌지? 하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했던 기억도 난다.
기도원에 다녀오신 후 어머니는 권사님들을 집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안방에서 안찰을 받았고, 며칠 후에는 형의 차례였다. 어머니가 맞을 때는 뭐.. 본인이 맞겠다고 그래서 맞는 거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만 형의 경우에는 좀 달랐다. 같이 기도해야 된다고 방으로 불러내서 눕게 하더니 악한 귀신아 물러가라 하면서 예전보다 더욱 세게 쳤다. 형은 괴성을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우렁찬 찬송 소리에 가려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비명 소리는 작아졌다. 서너 시간 후에 탈진해서 움직일 수도 없는 형을 보면서, 사실 처음에는 저 바보 자식은 맞아도 싸다 생각했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이 경우도 병든 자식을 병원에 넣어서 힘든 치료를 버티게 하는 다른 부모들과 크게 다를 건 없다. 둘 다 순간의 고통을 참으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믿음에 근거한 결정이다. 큰 차이점은 통계적으로 볼 때 병원 쪽이 그럴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꼭 통계적 지식이 있어서 아이를 병원에 보내는 것은 아니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병원을 믿으니까. 사이비 술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위에서 다 그렇다니까. 예수님이 고쳐주실 줄 믿으니까.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는 사실 우리가 살아온 주변 환경에 의해 결정지어지고, 그건 대부분의 경우 운에 달렸다.
형은 이틀 동안 움직일 수 없었고 소변에서 피가 나왔다. 학교에는 멍이 없어질 때까지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어차피 형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아쉬워할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는 멍이 오래갔다. 여름인데도 짧은 팔을 한동안 입지 못했다. 나중에는 아버지도 외삼촌과 가족들의 설득에 안찰을 받았다. 맷집이 좋은 아버지였지만 역시 병가를 며칠 내셔야 했다. 그리고 다들 내게 온 가족이 안찰을 받아야 더 큰 은혜를 받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정확히 무엇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이것은 아닌 거 같았다. 권사님들은 매주 우리 집에 왔고 간혹 잠깐 기도만 하게 방에서 나와라 했지만 나는 절대로 가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란 건 나보다 그다지 대단하게 차이 나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연장자라고 수그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만일 억지로 끌어간다면 나는 집에 불을 질러서 다 죽여버릴 거라고 했고 어머니는 사탄이 내 속에 들어가서 버릇없는 소리를 한다고 했지만 내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계셨다. 사탄의 자식이 불지른 집에서 타 죽는다면 안찰을 받은 보람도 없이 허망한 일이 아닌가. 결국 사람들은 포기했고 권사님들은 어느 날인가부터 바빠서 우리 집에 오지 않게 되었다. 외삼촌은 나에게 실망했다고 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나한테 무슨 기대를 할 리가 없는 외삼촌이 그런 말을 해 봤자 나는 별로 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외삼촌은 그 후 권사님들에게 자신의 차도 바쳤고 헌금도 많이 했다. 권사님들은 외삼촌에게 다미 선교회를 소개해 주었다. 휴거 소동 이후 외삼촌은 자신도 직접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6개월짜리 신학교를 다니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도 형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몸에 생겼던 멍은 사라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런 기도원이 한국에는 여러 군데 있었고, 안찰을 받다가 죽은 사람들을 기도원 측에서 몰래 암매장하기도 했다. 어떤 기도원 근처에서는 시신이 10구 넘게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뉴스들은 다른 굵직한 사건들에 가려서 당시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는 기도원, 고아원, 장애자들이 사는 복지원 이런 곳에서 매 맞아 죽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심심찮게 MBC 카메라 출동 같은 고발 프로에 나오곤 했었다. 20세기는 딱히 전두환이나 김일성만 야만스러웠던 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다 그랬다. 게으른 부하직원은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였고, 말대꾸하는 마누라는 처맞았고 애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 시대였다. 가정폭력을 처벌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왜 남의 집 사정을 나라가 참견하냐고 했다. 국민은 언제나 그들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어머니가 나의 게으른 신앙생활을 타박하실 때마다 나는 그래도 사이비들을 집에 데려다가 돈 내고 두들겨 맞지는 않았다고 대꾸했다. 아버지도 옆에서 "그때 아주 제대로 늘씬하게 맞았지" 하면서 히히 웃었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그러면서 다 배우는 거고 사람이 한번 실수한 것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게 제일 추잡한 거라고 꾸짖으셨지만 아버지의 "두 번 실수하면 사람 잡겠네" 하는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