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어느 날 부모님은 집에 개를 데리고 오셨다. 당시 대한극장인가 어딘가에 애견샵이 많았는데, 거기서 거금 십만 원인가 주고 사 오셨다. 부모님은 개가 들어오면 집에 조금이라도 활기가 차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거 같다. 형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셨다고 나중에 나에게 말씀하셨다. 개는 2개월 된 포메라니안이었고 한 뼘이 약간 넘는 크기였다. 부모님은 쇼핑백에서 개를 꺼내신 후 앞으로 친하게 지내라, 우리는 지금 볼일이 있어서 나가봐야겠다 하시고 다시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개를 무서워했다. 이빨도 다 나지 않은 개가 우리 집 마루를 킁킁거리며 휘젓고 다니는 동안 나와 형은 소파 위에서 겁에 질린 채로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절대 내려오지 않았다. 개는 무서워서 소파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우리를 보고 꼬리를 흔들며 몇 번 짖어댔다. 나는 개가 소파 위로 뛰어올라와 나의 목을 물고 흔드는 상상을 했다. 피는 마루에 분수처럼 흩뿌려질 것이고 집에 돌아온 부모님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불러온 참혹한 광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개는 내 신발보다 작았지만 나는 맹수가 작다고 얕보지 않는다. 개를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생긴 건 사흘 후의 일이었다. 개는 넓적다리를 긁어주는 걸 제일 좋아했다.
포메라니안이라서 개의 이름은 포미가 되었다. 우리 집은 이상하게 생명체가 들어오면 잘 자랐다. 화초도 죽지 않았고 장난 삼아 심은 수박씨가 거대한 덩굴을 이루기도 했다. 학교 앞에서 사 온 병아리 두 마리는 계속 커서 큰 수탉 두 마리가 되었다. 알을 낳는 암탉 병아리가 아니라 실망스러웠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 앞 노점에서 파는 병아리들은 다 쓸모없는 수컷이었다. 박스에 구멍을 내서 베란다에 집을 만들어 주고 살게 했지만 아무래도 주거환경이 좋지 않았던지 둘 중에 힘이 센 놈이 다른 한 마리를 쪼아 죽여버렸다. 남은 한 마리는 시커멓고 거대한 수탉이 되었는데, 닭이 너무 커지자 나는 무서워서 베란다에 나가지도 못했다. 수탉은 아침 6시 동이 틀 때마다 꼬끼오하고 울기 시작했다. 수탉은 방송국만큼이나 정확했다. 반상회에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몰상식한 집에서 닭을 키우는데 아침에 소음으로 많은 피해가 가고 있습니다, "라고 불만이 속출했다. 어머니는 수탉을 처리해야겠다며 박스에 잘 담아서 택시를 타고 주택에 살던 작은 이모네한테 갖다 주었다. 수탉은 처음 며칠은 넓은 마당에서 뛰놀며 행복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곧 작은 이모는 닭을 묶어서 정육점에 갖다 주었고 거기서 닭은 목이 비틀려 죽었다. 끓는 물에 담가서 털을 뽑고 내장을 제거한 뒤 그 닭고기로 이모는 백숙을 만들었다. 하지만 수탉이라 고기가 좀 질겼고 닭이랑 놀려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사촌누나는 밥상에 올라온 백숙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포미도 잘 자랐다. 포미는 뭔가 영리한 거 같으면서도 멍청했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항상 짖었지만 그게 우리 가족이면 짖지 않았다. 하지만 현관문이 열리면 아무한테나 반갑다고 오줌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신문지에 소변을 보도록 훈련을 시켰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포미는 오늘 막 들여놓은 잉크 냄새가 나는 신문에도 흥건하게 오줌을 누고 칭찬을 받으러 달려왔다. 나는 포미와 다정하게 같이 자고 싶었는데, 포미는 푹신한 요에 눕기만 하면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오줌을 쌌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엄마한테 매를 맞았지만 머지않아 우리 집 요에는 모두 포미의 오줌 자국이 생겼다. 그 후로 포미는 요만 봐도 기겁을 했고 꼭 사과 박스로 만든 자기 집에서 잤다. 거기에는 쉬야를 절대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개 사료란 게 별로 없어서 그냥 남긴 밥을 주었다. 개에게는 소금이 좋지 않다는 사실도 모르고 밥만 먹음 싱거울까 봐 된장찌개도 주고 그랬다. 어떨 때는 잘 먹었지만 어떨 때는 하루 이틀 먹지 않아서 개밥이 쉬기도 했다. 나는 몰래 두부니 고기 따위를 조금씩 모았다가 포미에게 주었다. 내 생각에는 내가 맛있는 것도 많이 주고 하니까 곧 네로와 파트라슈처럼 돈독한 사이가 되려니 했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개는 집안에서 제일 힘 세 보이는 부모님한테 아양을 부렸고 자기 심기가 불편할 때는 내가 건드리면 물려고 덤벼들었다. 잘 때 잘 자라고 쓰다듬다가 물리기도 했다. 그리고 아침에는 밥을 먹는 내 밑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먹을 걸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아버지한테는 눈치없이 으르릉 거리다가 몽둥이로 처맞은 이후로 절대로 대들지 않았다. 하루는 포미가 전선을 물어뜯어 놓아 끊어놓았고, 혼을 내려던 어머니를 피해서 소파 밑에서 으르릉 거렸다. 어머니는 나를 시켜서 소파를 들게 했고 총채로 포미를 마구 때렸다. 그 후로 어머니에게도 대들지 않았다.
나는 개들이 산책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집에만 있으면 답답할 거 같아서 종종 개를 끌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개는 가로수마다 쉬를 하려고 했다. 어떤 데다가는 똥을 싸기도 했는데 나는 그냥 거름이 되려니... 하고 그냥 놔두었다. 그때는 사람도 으슥한 골목에서 똥을 싸고 도망가던 시절이라 개가 그런다 한들 크게 흠이 될까 생각했다. 고무신을 신고 핵핵 거리며 줄을 끄는 포미를 겨우 개줄로 붙들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간혹 내가 다니던 서초 국민학교 운동장에 가서 아무도 없으면 개줄을 풀어주기도 했다. 개는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운동장 구석에 있던 '동물 체험관'으로 달려가 거기에 있는 토끼나 닭을 보면서 마구 짖어댔다. 처음에는 철망 안에 많은 수의 닭과 토끼가 있었지만 점점 그 수가 줄어들었다. 나중에 반장이 얘기하기를 주말에 학교 청소하는 아저씨들이 건물 뒤에서 불을 피우고 몇 마리 잡아다 구워 먹는 걸 봤다고 했다. 애들이 물끄러미 그걸 쳐다보고 있으면 "뭘 봐 꺼져 이새끼들아" 하고 성질을 낸다고 했다. 전형적인 80년대의 풍경이었다. 포미는 그들에게 "바보들아 빨리 도망쳐"라고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했듯이 포미는 요실금도 있었다. 뭔가 흥분하거나 반가우면 오줌이 줄줄 샜다. 하루는 포미를 산책시키러 데리고 나갔는데 비싼 외제차에서 선글라스에 모피코트를 입은 여자가 우리 개와 똑같은 개를 안고 내렸다. 연예인 아니면 부잣집 며느리 같은 생김새였다. 나를 부르더니 강아지를 좀 인사시킬 수 있겠니 하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포미를 안아 올렸는데, 자기와 똑같은 개를 본 포미는 안긴 채로 오줌을 질질 싸 댔다. 선글라스는 기겁을 하더니 아무 말 없이 차를 타고 사라졌다.
포미는 완전한 순종은 아니라서 눈 사이에 세로로 흰 줄이 있었고 덩치도 포메라니안 치고는 조금 컸다. 하지만 밖에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귀엽다고 몰려들었다. 포미는 오줌을 질질 흘리며 화답했다. 우리 옆집에는 화장을 진하게 한 누나들 셋이 같이 살았는데, 만나기만 하면 포미 안부를 물었다. 누나들은 낮에는 집에서 쉬었고 밤에 일하러 갔다. 누나들이 놀러 오라고 해서 나는 포미를 데리고 옆집에 몇 번 갔었는데, 으리으리한 이태리식의 가구들이 있었고 찬장에는 양주가 가득했다. 그 집 침대는 우리 부모님 침대보다 훨씬 넓고 컸다. 누나들은 화장이 매우 진했지만 아주 상냥했고 포미를 잘 데리고 놀아 주었다. 가끔 모르는 아저씨가 밤에 그 집에 들어갈 때도 있었는데, 나는 아빠겠거니 했다.
개를 키우면서... 개는 참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개는 죽을 때까지 거의 발전이 없다. 항상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아양을 떨면서 똑같은 길을 산책하며 매우 행복해한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나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짧은 생을 사는 개들이 보기에 우리는 늙지도 않고 언제나 맛있는 것을 마술처럼 만들어 내는 신선과 같은 존재들이지만 우리는 항상 똑같고도 짧은 인생을 사는 개들을 부러워한다.
포미는 자기가 앞으로 그렇게 계속 살 줄 알았겠지만 곧 포미에게는 큰 시련이 닥쳐오게 된다. 우리는 이민을 가야 했고 캐나다에 개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