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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Dec 27. 2022

포미의 마지막

1988년

사실 반려견도 예방접종을 맞고 수속을 마치면 얼마든지 주인을 따라 해외로 나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자면 비행기 표니 수속비니 해서 돈도 드는 데다가 가뜩이나 가족들 이민수속도 복잡해서 머리 아플 지경인데 개까지 데리고 나갈 여유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잘 안 풀려서 다른 나라로 피난 가는 처지에 개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아버지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개는 살아있는 장난감이었다.  장난감이 아프면 어느 정도 돈을 써서 고칠 수 있다면 좋지만 수지타산이 안 맞으면 버려도 누가 딱히 뭐라고 그러지 않았다.  장난감이니까 놀다가 싫증 나면 그냥 묶어놓고 밥만 주던지 아무 데나 버리는 일도 있었다.  


외삼촌도 주택에 살고 계셔서 집 지키는 작은 잡종개를 한 마리 키웠는데, 그 개는 매우 사나웠다.  조금만 가까이 가도 마구 짖으면서 물려고 덤벼들어서 주인인 외삼촌도 밥만 주고 놀아주지 않았다.  하루는 명절날 놀러 온 사촌형이 장난을 친답시고 분무기로 개 얼굴에 물을 칙칙 뿌리면서 성질을 돋우다가 손을 물렸다. 사촌형은 엉엉 울면서 병원에 가서 아주 아픈 광견병 주사를 맞아야 했다.  내가 알기로 그 개는 평생 마당 구석에서 2미터 남짓의 줄에 묶여 있었다. 개집은 시멘트 계단 옆에 있었고 거기에는 햇빛도 잘 들지 않았다. 그때는 개를 산책시킨다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개는 그냥 죽을 때까지 줄에 묶여 마당에서 사는 게 당연한 것으로 다들 알고 있었다.  집안에서 그냥 편하게 먹고사는 개들은 당시에는 '애완견'이라고 불렀고 가끔 신문에서는 소나 돼지는 고기로 인간들을 이롭게 하지만 요새 개들은 순전히 애완용으로 길러지면서 편하게 먹고 사니 세상이 점점 요지경이 되어간다고 한탄하는 사설도 심심찮게 읽을 수 있었다.  


 번은 포미를 데리고 작은 이모네 집에 놀러 갔었다. 사촌누나는 우리 개가 예쁘다고 한참 데리고 놀았는데, 그때 사촌형이 들어왔다. 사촌형은 더럽게 개를 집안에 들였다고 난리를 쳐서 우리는   없이 포미를 내보내야 했다. 이모  마당에는 이모가 키우던 멍청한 하얀 개가 살았는데,  개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그런지 한동안은 포미와  어울린다 싶었지만 멋모르는 포미는 배가 고파서  바보개의 밥그릇에 있는 개밥을 얻어먹으려다 바보개에게 혼쭐이 났다.   포미는 자기를 데리고 들어가 달라고 현관 앞에서 울어댔다.  사촌누나는 포미가 불쌍해서 집안에 들여놓으려 했지만 사촌형의 엄포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사촌형에게 우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개를 먹이고 재우는 타락한 부르주아였다.  사촌형은 우리가 이민  후에 대학에서 선배들에게 의식화 교육을 받고 나더니 운동권 핵심세력이 되었다. 이모부 말에 따르면 골수 빨갱이가 되었다고 했다. 데모를 많이 해서 잠깐 감옥도 갔다 왔다.  어학연수를 한다고 미국에  김에 캐나다 우리 집에도 잠깐 들렀는데, 미제 앞잡이들과 매파 자본가 그리고 일본 놈들이 얼마나 간악한지에 대해 한참 떠들었다.    사촌형은 대학을 졸업하고 그렇게 욕하던 미제와 자본가를 합친 외국계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취직해서 직장생활을 한동안 했다.  그러나 보스기질이 있는 사촌형은 어느  갑자기 사업을 해야 한다며 왔다 갔다 하더니   가지 않아 실패했다.  그냥 실패가 아니라 공무원인 이모부한테 권력에 기생하는 소시민이라고 일갈할  언제고 자기 돈은 물론이고 이모부 아파트도   날려먹었다.  사촌형은 곧이어 이혼을 했고 아이 부인이 데려갔다.  돈을 벌어서  애를 데려올 거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여의치 않았고 지금은 어디서  하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애를 추켜세워 버릇하더니 영웅심 때문에 저렇게 됐다고 말씀하셨다.


포미와 같이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부르주아답게 개를 데리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다.  주말이면 개울에 가서 수영도 하고 산에 가서 등산도 했다.  포미는 항상 에너지가 넘쳤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자기보다 큰 개들을 만나면 열심히 짖어댔다.  사람들은 개를 같이 데리고 다니는 우리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포미는 자동차에 타는 걸 주저했다.  차만 타면 얼마 가지 못해 침을 질질 흘리다 멀미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차 바닥에 신문지를 깔았고 포미가 침을 흘리기 시작하면 머리를 밖으로 들이밀었다.  하지만 차 타면 재밌는 데 간다는 걸 알게 된 포미는 차에  타라고 하면 주저주저하다 결국에는 깡충 뛰어올랐다.


포미가 멀미를 하는 원인에는 아버지의 운전습관도 있었다.  아버지는 만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항상 아무도 없는데도 브레이크를 조금씩 꾹꾹 밟았다. 고속도로에서도 그랬다. 운전하는 사람은 못 느끼지만 나머지 승객들은 아버지의 이런 운전습관이 매우 불쾌했다. 어머니는 브레이크 좀 덜 밟고 편안하게 운전 못 하냐고 타박하셨지만 아버지는 '그럼 앞차에 갖다 박을까'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앞차가 급정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앞차와의 거리가 약간이라도 가까워지면 브레이크를 꾹꾹 밟았다.  아버지는 항상 3초마다 한 번씩 백미러를 봐야 된다고도 하셨다.  내가 조수석에 탔을 때 아버지를 보면서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면 아버지는 꼭 셋에 백미러를 보셨다.  아버지는 항상 쓸데없는 걱정이 많았고, 나에게는 항상 잘 나갈 때 만용을 부리지 말고 겸손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겸손한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은 별로 없다.  아버지는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일들까지 걱정했었고 우리는 그것이 답답했지만,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된 나도 요새 들어 브레이크를 자주 밟는다.


시간은 흘러 포미를 보낼 날이 내일로 다가왔고 나는 잠을 자는 포미를 바라보면서 내일이면 저 개집도 비겠구나 생각했다. 새 주인은 시골에 사는데 개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잠을 자는 포미를 쓰다듬으면서 잘 가라고 했다. 잠이 깬 포미는 신경질을 내면서 내 손을 물었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포미의 머리를 후려쳤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잠을 잤다.


다음날 학교를 다녀와서 어머니에게 포미가 잘 갔냐고 물었다.  멋모르는 포미는 차에 타라고 하자 신이 나서 얼른 올라탔는데, 가족 중 아무도 같이 타지 않고 차가 떠나기 시작하자 창문 너머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게 포미의 마지막이었다.  몇 달 후 우리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한 장 받았다.  흙만 있는 마당에 줄로 묶여 있는 포미의 모습이었다.  새 주인은 당신네 개가 이렇게 잘 지낸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보냈겠지만, 포미는 우리와 살던 때보다 훨씬 꼬질꼬질해지고 눈에는 없던 눈물자국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포미도 이제 외삼촌네 개처럼 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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