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
1989년에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부모님이 오는 게 싫어서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집을 나섰지만 막상 졸업식이 시작되자 어른들로 복도는 인산인해였다. 괜한 소리를 했나 생각하던 와중에 부모님이 옷을 차려입고 꽃을 들고 느지막이 나타나셨다. 엄마들은 자기 아이가 개근상이니 우수상이니를 교탁 앞으로 나와서 받을 때마다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그때는 유급이란 것도 없어서 그냥 출석만 하면 졸업하는 국민학교였지만 부모님들은 무척이나 자식들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어머니는 학교 교문 앞에 있던 노점에서 꽃을 샀는데 바가지를 썼다고 불평하셨다. B와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인파에 밀려 집으로 왔다. 나는 사실 원래 거창한 작별을 좋아하지 않았다.
얼마 후 중학교 입학식 날에는 비가 왔던 게 기억난다. 학교는 내가 살던 아파트 바로 뒤에 있었고 지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어느 학교나 괴담이 있었다. '이 학교 부지가 원래 공동묘지였다더라...' 혹은 '학교 정문 입구에 있는 책 읽는 어린이 동상이 12시가 되면 일어나서 운동장을 돌아다닌다더라' 식의 조잡한 이야기였다. 동상 이야기는 조금 무서웠지만 공동묘지 소문은 믿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거의 십 년 동안 그 중학교 부지에 동네 할머니들이 나와서 채소를 심던 것을 매일같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겨울에는 물을 뿌려서 스케이트장으로 쓰기도 했다. 스케이트장 귀퉁이에는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서 그 안에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어묵이니 떡볶이니 하는 먹을거리들을 팔았다. 난 스케이트도 별로 재미없었고 분식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 항상 미군부대에서 분유 구제품을 포대에 받아오던 이야기나 6.25 때 피난 가던 이야기들을 신물 나게 하셨다. 나는 왜 아버지는 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들을 매일 읊어대실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고 구제품을 받거나 물지게를 지던 과거는 아버지가 중학교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에게는 그러한 기억들은 까마득한 과거가 아니라 바로 어제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지나가는 아이들을 붙잡고 플로피 디스크나 워크맨 이야기를 한다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쳐다보던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나중에 자기 아이들에게 일론 머스크와 테슬라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들은 '세상에 그때는 그런 차도 좋다고 돈을 주고 타고 다녔군요'라고 답할 것이다. TV프로에 유재석이나 김태희가 나오면 우리는 '어머 저 늙은 것좀 봐' 하면서 문득 몇십 년 전 박원숙이나 혜은이가 TV에 나올 때 흠칫 놀라던 부모님이 생각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때도 웬만한 집에서는 중학교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에 일 년 치 예습을 시켜놓는 게 관례였다. 입학식 날 아이들은 서로들 "난 중1 수학 영어 다 떼고 중2 거 공부하고 있어" 하면서 으스댔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예습을 원래 해야 되는 거였나...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예습했다고 자랑하는 아이들 치고 제대로 공부하는 놈들은 별로 없었다. 아파트 반상회에서도 아줌마들이 어머니 보고 애를 그렇게 놀게 내버려 두면 중학교 올라가서는 꼴찌를 헤멜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말에도 별 동요가 없었다. 친구들이 공부하느라 바쁜 와중에 나는 남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좌석버스를 타고 서울 아무데나 갔다가 돌아오기, 강남역 유흥가 뒷골목 탐험하기, 안 가본 오락실 찾아 가보기 등등 하면서 혼자 놀았다.
얼마전 서울에서 중학교 올라가는 자녀들 둔 친구가 하는 말이 대치동 학원에 상담을 갔더니 거기 코디네이터가 일년치 예습은 물론이고 엘리트 반 아이들은 교과과정을 2년 먼저 뗀다는 것이었다.
"그럼 중학교 1학년땐 예습 다 했는데 뭘 배우나요?"
"아유 참, 그때는 중학교 2학년걸 배워야죠!"
친구 생각에도 이건 뭔가 아닌 거 같았지만 요새는 그렇게 하지 않음 중학교 들어가서는 도저히 공부를 쫓아갈 수 없다고 학원 측에서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공부를 정말로 잘하는 아이들은 티를 내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그런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의사가 되거나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딱히 그렇게 잘 사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자는 어머니가 공부만 잘하면 돈 많이 벌어서 가정부를 두면 되니까 집안일 따위는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을 공부기계로 조련했다고 말해주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일단 직장에 들어가긴 했는데, 사람 보는 법도 모르고 상식이란것도 보잘것 없었다. 미역국을 끓이겠다고 물에 미역만 넣고 끓이고 나서 왜 맛이 나지 않을까 하면서 나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나는 세상에는 육수라는 것이 있다고 말해 주었고 그녀는 충격을 먹은 듯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녀는 똑같이 공부만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했는데 이 남자는 공부를 너무 좋아해서 돈 벌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제 취직을 하려나 싶음 다시 학교에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가정부는 커녕 돈도 벌고 일도 해야 했다. 보건 상식도 별로 없던 그녀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5개월이 지나서야 알아차렸다. 지금은 갖은 시행착오 끝에 어찌어찌 잘 살고 있지만 그 어머니의 교육철학이 약간 느슨했었다면 그녀는 좀더 편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