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런인생 Mar 04. 2023

선생님들

나는 지난달에 5년 만에 서울에 갔었다. 익숙한 디젤 매연과 하수구 냄새를 맡으니 옛날 기억이 모락모락 났다.  그에 걸맞게 중학교 때의 친구들도 여럿 만났다.  그들은 살던 곳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므로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기분을 이해할지 못하겠지만 고맙게도 다들 반겨 주었다.  그중 대부분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같은 반이었다.  고작 5개월 같은 반이었다는 인연으로 30년이 지나고 나서도 밥을 사주고 자기들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 그들은 중 3, 고 1, 2, 3 그리고 대학을 거치면서 매년 나 정도로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나의 인생의 1부는 캐나다로 이민을 오던 날 끝이 났다. 이민을 와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항상 무언가 어색했다.  그들과는 연락이 끊겨도 굳이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중학교 때 친구들은 갖은 방법으로 수소문하며 찾았다.  그중에는 다시 만나기 꺼려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대부분은 나를 기억하고 반가워했다.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 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참 우습다, 최승자)


다니던 중학교도 다시 가 보았다. 서초동의 위용에 걸맞게 학교는 시설이 좋아 보였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야구부가 이제 유명해졌다고 한다. 30년 전에는 야구부란건 존재하지도 않았었는데.  건물은 그대로였다. 교문은 촌스런 초록 페인트 대신에 흰 칠이 되어 있었지만 가운데 붙은 학교 로고는 그대로였다. 옛날에는 저 로고가 새겨진 학교 배지와 사진이 붙어있는 명찰을 달지 않으면 등교를 못 하게 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옛날에는 이상한 법이 참 많았다.  


운동장 구석에 새로 체육관 같은 것이 생겼지만 운동장도 퍼석퍼석한 모래가 깔린 채로 그대로였다. 그때는 학생들은 체육 시간 말고는 운동장을 밟지 못했다. 사람들이 많이 밟으면 땅이 다져져서 넘어지면 다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들은 아무 때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녔다.  


교직원들의 자동차는 30년 전처럼 운동장 모서리에 일렬로 평행주차되어 있었다.  우리 1학년 담임은 일본에서 살다가 서울대학교를 나와서 수학을 가르치는 키 작고 주름 많은 남자였는데, 애들이 운동장에서 공놀이라도 하려면 자기 차가 공에 맞을까 봐 신경질을 내면서 딴 데 가서 놀라고 했었다.  그때는 교실 복도 쪽 유리창이 딱 한 장만 빼고는 다 불투명 유리창이었다.  투명한 유리는 밖에서 선생들이 반 안을 들여다볼 수 있기 위함이었다.  키가 작은 담임은 항상 까치발을 하고 얼굴을 반만 겨우 내밀고 떠드는 놈들이 누군지 잡으려고 밖에서 쳐다보곤 했다. 체육 시간에는 남자 여자가 교대로 교실과 화장실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남자건 여자건 서로 옷 갈아입는 걸 훔쳐보려고 기를 써서 항상 누군가가 투명 유리창을 옷으로 가리고 있어야 했다.


담임 말고도 기억에 남는 선생들은 많았다.  학생주임인 국어선생님은 깡패들 잡으려고 학교 뒤 으슥한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불량배들이 나타나면 때려잡곤 했다. 선생님은 50대 아줌마였지만 덩치가 매우 컸다.  


물리 선생님은 자기가 4.19 때 데모하다가 총 맞을 뻔한 얘기들을 실감 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옛날에는 여학생들이 숙직실에서 남선생님과 정분이 나서 임신을 했는데 그걸 감추려고 붕대로 배를 꽁꽁 싸맸다는 이야기도 종종 했다.  아마 여학생들 보고 남자는 선생이라도 조심하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생물 선생님은 남자아이들이 떠들면 젖꼭지를 비틀어 꼬집었고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어느 날 여자아이가 떠들다가 걸렸다.  과연 여학생의 젖꼭지도 비틀 것인가! 반의 모든 학생들이 귀추를 주목하는 가운데 선생님은 대신 겨드랑이를 꼬집어 비틀었다.  우리는 실망했다.  


기술 선생님은 매일 웃기지도 않은 얘기를 하면서 혼자 실실거리다가 기분이 나쁜 날이면 눈치 없이 떠드는 아이를 불러내서 마구 팼다. 올라타서 발로 밟기도 했다. 


음악 선생님은 빈정거리기 좋아하고 가슴이 크고 입 옆에 점이 있는 여자였는데 어느 날 교무실에 심부름을 가니 그 여자가 기술 선생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냥 저 둘은 친한가 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중에도 사회 선생님이 특히 인상 깊었는데. 그녀는 중년의 여선생이었다.  가끔 담배를 칠판 구석에 놓은 채 잊어버리고 가는 적이 많았다. 우리에게 항상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나라'를 사 읽으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지만 나는 거기에 나온 이야기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이라 구태여 살 필요가 없었다.  고대 역사부터 현재 국제정세까지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은 싫어하는 학생과 좋아하는 학생을 대놓고 구분 지었다.  싫어하는 학생은 틈나는 대로 태도를 지적하면서 망신을 줬고, 좋아하는 학생은 대 놓고 칭찬을 했다.  나는 다행히도 선생님이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루는 네덜란드의 무역 역사에 대해 설명하다가 반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여러분들은 전쟁이 났을 때 금 백만 원어치와 현찰 백만 원어치 둘 중에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현찰에 손을 들었다. 금에 손을 든 아이는 나 혼자였다.  선생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나는 "현찰은 사람이 가치를 약속한 종이조각이지만 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전쟁 시에는 금을 고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나를 비웃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나는 여러분들이 왜 저 친구를 비웃는지 모르겠어요, 저 친구가 유일하게 맞았습니다" 하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아서 그 시간에 신문이나 집안에 굴러다니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었기 때문에 이런 잡다한 상식에 강했다. 그 후로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종종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때마다 대답을 했다.  내가 이민을 간다는 이야기가 돌자 선생님은 반까지 찾아오셔서 참 아쉽지만 가서도 잘 지내라며 인사를 해 주셨다.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요새는 도시락도 안 싸가도 되고 짝이란 것도 없고 한 반에 25명밖에 없고 음악시간마다 풍금을 다른 반에서 갖고 오지 않아도 되고 (음원을 틀어준다고 한다) 선생님이 차별하거나 하면 아동학대로 신고할 수 있다고 한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중학교 입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