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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Sep 23. 2022

짝, 열두 살의 봄

1988년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여자 친구를 사귀려면 예쁜 여자를 만나라, 못생긴 여자는 절대 안 된다."

애초에 사람의 얼굴을 잘 구분 못하는 나는 그럼 어떤 여자가 예쁜 여자냐고 물었다.


"네 엄마만큼 예쁜 여자면 된다."


그런데 항상 보는 어머니 얼굴이 예쁜지 뭔지 나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실제로 어머니는 미모가 뛰어나서 다니던 대학교에서도 유명했었고 항상 어디 나가면 미인이라고들 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어머니는 하도 자주 듣는 말이니 덤덤해하셨다.  어렸을 때는 백화점 점원이 나와 어머니의 얼굴을 교대로 번갈아 보다가 "사모님은 이렇게 미인이신데... 정말 아들이에요?" 하고 묻기도 했다.  옛날의 백화점 점원들은 오지랖이 넓었다.  


나는 그냥 시답잖은 소리려니 했지만 아버지는 진심이었다.  아버지는 여자가 예쁘지 않으면 불쌍하다고 여겼다.  여자애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좋지만 못생겼다는 말을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그 말은 일평생 크나큰 상처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서 누구에게도 못생겼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 눈에는 아무나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다들 그럭저럭 괜찮아 보여서 그렇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 나는 보통사람들보다 상당히 느슨하거나 혹은 뒤틀린 미의 기준을 갖고 있다.  아주 오래된 친구 S에게 내가 보기에 넌 꽤나 예쁘다고 말하자 그녀는 슬퍼했다.  


아버지는 내가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보여줄 때마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별명을 붙여 지칭했다. 요괴인간, 고인돌, 썩은 돌덩어리...  그런데 지금의 아내를 보여드렸을 때는 그러시지 않았다. 결혼하면 개고생 할 텐데 하려면 해라 라는 말씀만 하실 뿐이었다.  


아버지의 신념은 일평생 확고했고 훗날 나의 아내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아내는 아버지에게 "하지만 예쁘지 않아도 마음이 착할 수도 있잖아요"라고 되물었고 아버지는 "못생긴 여자가 맘이 착할 리가 있냐, 못생긴 여자는 맘씨도 고약하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어떻게 생긴 것이 예쁜지 잘 분간을 못하는 나는 맘씨가 고약한 여자도 마찬가지로 가려낼 수가 없었다.    


86년쯤 해서 국산 "소년소녀 명랑소설"장르가 대유행하기 시작했다.  88년에 출간된 "6학년 3반 청개구리들"이라는 책은 "4학년 3반 청개구리들"의 속편이었는데,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닌 아이들 간의 우정, 사랑, 뭐 이런 알맹이도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비슷한 시기에 성교육 서적들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필두에는 "열두 살의 봄" 이 있었고 그 책이 히트를 치자 온갖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그냥 애들 상대로 음담패설하는 것 같은 책도 있었다.  나는 당시 강남역 지하에 있던 동화서적이라는 곳에 가서 그런 책들을 열심히 공짜로 읽으며 사진이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미디어의 영향을 받아서 나도 여자 친구가 있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멀리 갈 것 없이 나는 내 짝을 자주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실 B는 나의 두 번째 짝이었다.  담임이 자기가 총애하는 아이들을 앞에 앉히느라고 자리배정을 다시 하는 바람에 B가 내 옆에 앉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매주 산수 시험을 봤는데, 칠판에 적힌 문제를 받아 적고 답을 적는 방식이었다.  제한시간이 지나면 짝과 바꿔 채점을 했고 틀린 개수만큼 매를 맞았다.  나는 눈이 나빠서 항상 문제를 틀리게 받아 적었고 그 때문에 만점을 받는 일이 드물었다.  처음 짝은 그때마다 잠시 고민하다 답을 맞게 고쳐주곤 했다.  그러나 반 배정 후 착한 짝은 가고 B가 왔다.  B는 산수 시험을 절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 답도 절대 고쳐주지 않았다.  나가서 손바닥을 맞는 나를 보고 싱글싱글 비웃기도 했다. B는 은근한 왕따였는데, 그 이유는 눈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수학 잘하고 사회성 없는 아이였다. 걸핏하면 남자애들을 때렸고 그때마다 아이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인정된 강도 이상으로 때렸다.  그리고 남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 이를테면 "너 같은 게 뭘 안다고" 혹은 "너 되게 멍청하다" 같은 말들을 예사로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유전이어서 B의 어머니도 교회에서 노냥 자식 자랑에 눈치 없이 굴어서 왕따 신세였던 것이다.  역시 눈치 없기로 유명한 나의 눈에도 B가 따돌림받는 것이 보였고 그런 게 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좀 잘 타이르면 고쳐지지 않을까 싶었다.  나이 먹어서 연애가 어려운 이유는 사람은 웬만해서 고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상대방의 단점이 아무리 커도 자기가 잘 말하면 알아들을 거 같거나 그 정도는 참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나는 별다른 구애의 기술 없이 어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같이 앉게 됐는데 연애나 하자고 식으로 말했던 거 같다.  그런데 어린이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어서, 그렇게 직접적인 방식으로 호감을 표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기겁을 함과 동시에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때만 해도 연애란 것은 대학 가서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여서 나는 반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요새 말로 하면 B를 고백해서 혼내준 것이다.  B는 책상 밑에 몰래 순정만화나 소설을 감추고 수업시간에 읽었는데, 거기에는 항상 멋있고 옷 잘 입고 향기가 나는 남주인공이 등장했었다.  그에 반해 나는 똑같은 파란 셔츠 두 벌, 회색 바지 두 벌로만 한 학기를 보낸 적이 있었다.  어른이 된 후에 스티브 잡스가 매일 똑같은 옷을 입는다는 소리를 듣고 날 따라 하는가 싶어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눈이 나빠서 칠판에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어머니께 불평하자 어머니는 서랍에서 10년도 더 된 본인의 안경을 꺼내서 주셨다.  한동안 아줌마 안경을 끼고 다녔는데, 잠깐은 잘 보였지만 그 후로 내 시력은 더욱 악화되었다.  아버지는 멀지 않은 거리를 걸으실 때면 슬리퍼 대신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는데, 고무신의 편리함에 압도된 나는 내 고무신을 사서 신고 다니다 하루는 학교에도 신고 갔다.  학교에서는 또 한 번 난리가 났고, 선생님들은 복장 규칙 위반이 아닌가 했지만 학칙에는 고무신을 금지한다는 말이 쓰여있지 않았다.  고무신을 풍기문란한 복장으로 보는 것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나는 크게 야단은 맞지 않았지만 이후 학칙에는 고무신 금지 조항이 들어갔다. 


패션감각 하나만도 이만큼 문제가 많으니 전반적으로 내 수준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장점은 공부를 조금 한다는 것과 애들을 잘 웃긴다는 것 말고는 많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B는 얼굴도 예쁘장했고 가슴도 매우 컸다. 우리 반 문제아 중 하나가 어쩌다 B의 가슴을 밀었는데 B는 담임이 들어올 때까지 그 아이를 마구 때렸다.  담임은 현장검증을 해야 하니 싸움이 나기 전 상황을 반 아이들 앞에서 그대로 재현하라고 했다.  B는 울었고 담임은 그런 B를 윽박질렀다.  그 후 내가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식으로 아이들에게 말을 하자 평소에 B에게 많이 맞았고 어디서 들은 말은 꼭 써먹던 내 친구는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로 "넌 사랑에 눈이 멀어서 뵈는 게 없는 거야!"라고 일갈했다.  그 후로 B는 나에게 더 자주 신경질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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