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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판이란 건 믿을 게 되지 못한다

1995

by 그런인생

시간은 흘러서 대학 1학년을 마쳤다. 그동안 소소한 일들이 여럿 있었다.

더워서 열어둔 창문으로 다람쥐가 들어와 책장 위에 올려져 있던 주전자를 떨어뜨려서 노트북을 망가뜨렸다. 나는 노트북 제조사 사무실을 찾아가 부서진 부품을 사 왔다. 수리비는 100불이었지만 나는 그런 돈이 없었고 천만다행으로 노트북은 제대로 동작했다.


기숙사 하우스메이트들은 종종 근처 실내 농구장에서 농구를 했다. 나도 처음에는 몇 번 같이 했으나 나중에는 나를 대놓고 끼워주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내가 농구를 좀 거칠게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평소에는 친한 척하던 애들이 농구할 때는 나를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했다. 왕따를 당하는 일은 퍽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충격을 받을 일도 아니다. 또래에게 따돌림을 받아서 힘들다는 애들은 어차피 잘 되어 봤자 남의 시다 노릇이나 할 팔자다. 나는 남이 나를 꼭 좋아해야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다. 어차피 이 기숙사에서 나가면 언제 볼지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미적분 수업시간에 옆에 앉은 여학생과 친해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미적분이 뭔지도 모르는 수준이었고 나에게 숙제를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알게 된 사이였다. 뭔가 바람돌이를 닮은 키가 작은 여자였다. 항상 환경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사람들이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간다고 그 나이대의 여자들이 흔히 열을 올리는 사회 정의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다. 마지막 수업날 나는 잃을 것 없다는 생각에 커피라도 한잔 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러지 뭐 하면서 장소와 시간을 말했다. 어 이게 되네? 하고 생각했지만 막상 약속한 날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학기에 그녀를 어딘가에서 마주쳤다. 오랜만이네? 하고 말을 건네자 그녀는 뭔가 불안한 눈빛으로 "미안합니다 난 당신 처음 보는데요" 하더니 황급히 사라졌다. 잠깐 나는 착각을 했나?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 여자가 맞는 것 같았다. 애초부터 거절하면 될 것을 이렇게 인생을 번거롭게 사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나는 일단 컴퓨터로 전공을 정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당시에는 컴퓨터를 전공하려면 1학년 수학과 컴퓨터 과목에서 65점을 넘어야 했다. 65점을 넘는 게 그렇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의외로 탈락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컴퓨터 공부는 대부분이 독학이다. 다른 과목들처럼 교수가 말하는 걸 잘 외우고 문제 풀고 그러는 게 다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코드를 짜야한다. 정답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 입력해도 에러가 났다. 코드를 돌아가게 하는 컴파일러의 세팅도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건 수업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컴퓨터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밤도 새우고 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사흘을 끙끙 앓으며 고민하던 문제가 나중에 알고 보면 점 하나를 잘못 찍어서 그런 적도 허다했다. 간혹 가다 소질이 없는 사람들이 어찌어찌해서 컴퓨터 전공으로 졸업을 한다. 남자친구가 대신 숙제를 해 준다던지, 어디서 돈을 주고 숙제해주는 사람을 고용했다던지... 그러나 그렇게 해서 졸업한 사람들이 취직을 제대로 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취업전망만 보고 컴퓨터를 전공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 그나마 그 취업전망도 지금 AI 때문에 하락하고 있는 중이다.


학기가 끝나고는 밴쿠버로 돌아갔다. 요새 학생들은 방학 기간 동안에는 코업을 한다 인턴을 한다 혹은 알바라도 하지만 난 "여름방학은 쉬라고 있는 건데 왜 일을 해?"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난 대학 생활 내내 방학을 생산적으로 보내본 적이 별로 없다. 엠지 세대들이 형편없다고 사람들이 욕을 해대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다 나보다 부지런하기 때문이다. 난 바쁘게 움직이는 게 적성에 맞지 않고 틈만 나면 멍하니 이런저런 공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밴쿠버로 돌아가니 의외로 사람들은 나를 과대평가하기 시작했다. "명문 토론토대 다니는 천재 친구" 식으로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런 대접을 받아보겠는가. 토론토에서는 여기저기 치이면서 정신없이 1학년을 보냈다. 나는 돈도 없었고 왕따였고 바람돌이같은 여자에게 바람맞기나 하면서 빌빌거렸지만 사람들은 나에 대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고 나는 어느새 엘리트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판 같은 건 믿을 게 되지 못한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보면 없는 얘기도 지어내는 법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는다. 어차피 그런 건 내 통제 밖이기 때문에 이웃과 친척들에게 소문이 어떻게 날까 걱정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한 친구는 쇼핑몰에서 날 마주치고 나서 내가 고등학교 때 한창 쫓아다녔던 M이라는 한국 여자애에게 "걔 토론토 갔다 오더니 엄청 멋있어졌더라" 하면서 바람을 넣었다. 귀가 얇은 M은 언제 한번 인사나 하자며 연락을 했고 난 부푼 마음으로 약속장소에 갔지만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대놓고 "에이 뭐 그대로네..." 하고 실망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이상하다. 토론토대학 기념품점에서 산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갔는데...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M은 뭔가 조약돌 같이 생긴 대구 출신 여자였다. 내 눈에는 예쁘게 보였으나 그녀를 예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M도 첫 연애는 제대로 된 사람과 하고 싶었는지 나에게는 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졸업 후 자칭 캐나다 최고의 명문이라는 퀸스 대학에 입학했다. M이 생각하는 대학생활은 우리 아버지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바쁘게 학교 한인들과 놀러 다니면서 생애 첫 연애도 했다.


그런데 M은 성질이 괄괄했다. 아마 지방의 큰 조폭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그랬을 것이다. 친구들과 M의 집에 놀러 간 적이 한번 있었는데 키가 작고 몸이 다부지고 눈빛이 매서운 아저씨였다. 웃통을 벗으면 여기저기 칼자국이 있을 것만 같은 외모였다. 벽에는 활과 화살이 걸려 있었던걸로 기억한다. 아저씨는 손을 씻고 초야에 묻혀 살겠다는 마음으로 이민을 왔고 물정 모르는 이민 초짜답게 장사가 아주 안 되는 교포의 쿠키가게를 인수했다. 그 교포는 우리 아버지가 아는 사람이었고 계약이 성사되자 아버지에게 신나서 "드디어 팔렸어요!" 하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가게를 내놓으면 매장의 물건 가격을 많이 내려서 손님을 몰리게 하는 건 해묵은 수법이었다. 인수하자마자 가게에 손님이 뚝 떨어지자 속은 것을 안 M의 아버지는 초심을 잃고 전 주인의 집 앞에 가서 "나와 이 개새끼야 내가 이 집 다 불질러 버릴 테다" 하고 호령을 했다.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모르지만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쿠키가게는 계속 장사가 되지 않았다. 아저씨는 얼마 안 가 장사를 접었다.


M의 대학생활도 그만큼 파란만장했다. 어느 날 남친과 다투다가 화가 난 M은 이성을 잃고 손에 잡히는 대로 유선전화기를 들어 남친에게 던졌고 이마에 적중했다. 남친의 이마에는 피가 흘렀다. M은 아버지에게 일찍이 무예를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게 전화기가 아니라 식칼이었다면 이야기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남자는 M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그 후 그녀는 수업도 가지 않고 폐인처럼 기숙사에 틀어박혔다. 한겨울 눈보라를 뚫고 친구 집에 가서 한국 로맨스 드라마 비디오를 빌려다 보면서 꺼이꺼이 울다가 다시 눈길을 걸어가 돌려주는 날이 반복되었다.


결국 M은 자살을 결심했고 타이레놀 한통을 다 먹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런다고 죽지는 않는다. 간만 작살날 뿐이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아내는 그렇게 실려오는 여자애들이 드물지 않다고 말했다. "타이레놀 처먹던지 커터칼로 손목에 깔짝대던지... 그런 년들 중에서 죽은년은 아무도 없어, 바쁜데 그런애들 오면 짜증만 나. 진짜 죽고싶은게 아니고 그냥 나 봐달라 이소리야. 근데 아저씨들이 자살시도를 하면 대부분 죽어..." M은 며칠 동안 움직이지 못했고 친구가 대소변을 다 받아내주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대학도 그만두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M과 이어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했다. “그랬으면 너 이마 빵꾸 나고 칼침 맞았다, 어휴 무서워.” 인생은 새옹지마다.


공부 잘한다고 남들이 부러워하던 M이 자살을 시도하고 성적 미달로 대학서 쫓겨났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다들 쯧쯧 그 집 딸 이제 어쩌지 하면서도 남의 불행은 재미있는 법이라 다들 쑥덕거렸다. 그러나 평생 그렇게 살라는 법은 없다. M은 일 년 후 해외교민 대학전형으로 한국의 명문대를 입학했다. 듣기로는 지금은 한국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M이 한국에서 다시 잘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은근히 놀랐지만 나도 토론토에서 빌빌거리면서 겨우 일 년 버텼을 뿐인데 밴쿠버 한인사회에서는 뭔가 대단한 청년인양 이야기가 도는 것을 보고 뭔가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아무리 별 볼 일 없더라도 나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뭔가 아는 척을 하면 의외로 먹히는 경우가 있다. 인생은 기세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주위의 한국인들도 대부분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외국 대학 학위에 영어를 할 줄 알면 대기업 입사는 식은 죽 먹기였고, 몇몇은 압구정동 일대를 다니면서 오렌지족 흉내도 내곤 했다.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캐나다 시민권을 땄기 때문에 군대도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70년 대생들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제일 운 좋은 세대가 아닌가 한다. 그때는 눈치가 빠르면 남보다 엄청나게 앞서 갈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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