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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1995

by 그런인생

어릴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 4년의 대학 생활은 사실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지만 18살의 1학년 학생에게는 졸업 이란 까마득한 미래의 일이다. 나는 6개월 이후의 일을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인생의 장기 계획도 세워 본 적이 없다. 세상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사실 계획이란 건 게으른 사람들일수록 꼼꼼하게 세운다.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적고 미래의 나는 이런 훌륭한 사람일 거야 하고 한껏 자아도취를 하면 지금의 불안감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뭘 시작하는 건 겁이 나기 때문에 한껏 좋아진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계획의 실행은 내일로 미룬다.


그래도 대학 이후의 진로는 간혹 고민이 되었다. 돈은 얼마나 벌어야 하나? 꼭 누구랑 같이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생각에 인생은 너무 길고 지루하다. 태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나왔으니 최소한의 노력으로 고통을 최대한도로 피하는 것이 나의 삶의 방식이다. 나는 이것저것 많이 해보면서 오래 살고 싶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정말로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건지 아니면 본인들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덜 무료하게 해 보려고 그러는 것인지 궁금하다. 나는 물건을 많이 들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도 귀찮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지 않다. 나는 30년 전부터 미니멀리즘이 좋았다.


토론토 대학 내의 도로 갓길에는 학생들이 주로 주차를 했다. 주차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홍콩에서 온 중국인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검은색 BMW를 좋아했고 이상한 스티커도 차에 덕지덕지 붙이고 다녔다. 좋은 차를 몰고 다니는 학생들은 웬만하면 다들 옆에 멀쩡하게 생긴 여자도 데리고 다녔다. 한국인들은 홍콩인들보다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부자들이라 해도 한 단계 아래의 차들을 타고 다녔다. Eagle Talon, 혼다 프렐류드, 닛산 240sx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지금도 딱히 불편할 거 없이 살고 있는데 저렇게 살아 봤자 괜히 더 피곤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난 주말이면 청소를 마친 깨끗한 방에서 차이나타운에서 포장해 온 $4.99짜리 중국음식을 먹으면서 티비를 보는 인생이 만족스러웠다. 남들이 자랑하는 예쁜 여자친구나 자동차는 그럴싸해 보였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여자친구는 $4.99짜리 음식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아무리 여자친구래도 남이기 때문에 자주 보면 불편할 것이다. 좋은 자동차도 제대로 굴리려면 타이어도 갈아주고 오일 체인지도 해주고 세차도 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Yonge과 Dundas 교차로 근처에는 Sam the record man이라는 큰 레코드점이 있었다. 그 옆에는 체스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항상 꾀죄죄한 사람들이 체스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실력이 뛰어났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거지들이 체스도 둘 줄 아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 중에는 체스 챔피언도 있었고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돈이나 가족에 관심이 없었고 그런 데 가서 체스 두고 토론하고 그러면서 인생을 보냈던 것이다. 그 레코드샵 근처 Ryerson이라는 대학 근처에는 핫도그 노점이 하나 있었다. 노점 주인은 그 대학 공대를 졸업한 사람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엔지니어가 되기보다는 핫도그 장사를 택했다. 그는 머리도 좋았기 때문에 간혹 학생들이 수학 교과서를 들고 와서 질문을 할 때마다 대답도 곧잘 해 주었다.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핫도그는 안 팔리면 집에 가서 먹으면 되니까.


공부를 아주 잘하는 사람들 중에는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거지처럼 살아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즐겁게 늙어간다. 나도 그런 인생을 원했지만 나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그런 흉내를 냈다간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었다. "쟤는 머리도 안 좋은데 괴짜 천재처럼 하고 다니더라." 그런 소리를 듣기는 싫었기 때문에 나는 평범하게 살자고 결심했고 남들처럼 직장에 들어가서 튀지 않으며 살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돈을 많이 벌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꿈을 꾸지만 나에게 그런 것들은 시시해 보였다. 가족을 만들다니, 왜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사는 고생을 사서 하려는 걸까. 어떤 인간이 나올 줄 알고 무턱대고 애를 낳는 걸까. 모든 행동에는 리스크가 따라온다. 가정을 꾸리는 데 수반하는 리스크는 그것이 주는 이득에 비하면 너무 커 보였다. 결국에는 혼자 살기 싫어서 결혼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도 마흔이 넘으면 외롭다며 비슷한 사람들끼리 무리 지어 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외로움을 잊어보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나는 마지막 학년의 기말고사를 보고 일주일 후에 직장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공백 없이 25년째 회사를 다니고 있다. 돈도 얼마간 모았고 취미도 몇 가지 있고 오래 연락하는 친구들도 몇 있다. 이제 나이가 드니까 여기저기 몸에 고장도 난다. 하지만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프지만 않으면 내일 죽어도 나쁠 것이 없다. 나는 30에 죽으려는 원래 계획보다 거의 20년이나 초과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병원의 어린이 대기실에 있는 장난감들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제고 가야 되면 그냥 놓고 와야 하는 것들이고 죽은 뒤에는 아쉽다던지 억울하다던지 하는 생각은 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도 머리를 다치면 기억을 잃는다. 죽어서 기억을 담고 있는 몸이 다 썩어버렸는데 생전의 것들을 아쉬워할 리가 없다.


중상류층 집안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이런저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유익한 조언을 해 준다던지, 연줄을 대 준다던지.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인생계획이 그랬듯 즉흥적이고 허황된 이야기만 했다. 한국사람들은 뭐든지 외국에서 왔다고 하면 껌뻑 죽으니까 여기서 어떻게든 박사학위까지 받기만 하면 아버지가 아는 교수들한테 적당히 얘기를 해서 교수로 임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대학 때 공부도 못하고 취직도 못해서 빌빌거리던 애들이 유학을 가더니 돌아와서 교수 자리를 꿰찼다며 너는 이미 외국에 와 있으니 반은 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학생들 중에서 얼굴이 반반한 애를 골라서 결혼하면 일석이조라고 했다. 아버지는 틈만 나면 인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들을 많이 아는구나 싶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누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아는 사람도 없는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아버지는 남에게 도와달라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셌다. 그런데도 인맥을 중요시했던 이유는 어릴 적 인맥의 수혜를 적잖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삼대독자였던 아버지는 공명심이 높았고 항상 누군가의 인정에 목말라했다. 하지만 누나 셋을 가진 삼대독자답게 뭐든지 별거 아니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막상 어려운 일이 생기면 회피하기 바빴다.

서울대를 나오고도 취직자리가 변변찮아 할아버지가 인맥으로 취직을 시켜준 적도 있었다. 친가에서는 무슨 일을 해결하려면 항상 "아는 사람"을 찾았다. 남의 도움으로 능력 밖의 일을 해결하는 일이 잦다 보면 사람들은 그걸 본인의 능력으로 착각한다. 헛공상을 해도 실제로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취직 걱정은 말아라, 한국에 아빠 친구들이 많으니까..." 아버지는 항상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사회에서 인맥이란건 혈연과는 달리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입장에 있어야 쓸모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니까.


내가 고학년으로 올라가자 돈을 그만 벌고 나와 같이 살고 싶었던 아버지는 박사학위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졸업은 언제 해서 돈을 벌거냐고 계속 독촉을 했다. 나도 그때쯤 내가 대학원을 다닐 능력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포기하고 취직을 했다. 박사학위를 따서 여대 교수로 출세하라는 아버지의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말을 청산유수로 하는 사람들에게 혹했다. 아버지 학벌 하나 믿고 결혼을 했지만 아버지의 약속들이 대부분 공수표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은 일단 믿고 봤다. 특히 카리스마 있는 목사들의 말은 철석같이 믿었다. 포마드를 잔뜩 발라 번쩍거리는 흰머리에 아무나한테 호통을 치고 성경구절을 줄줄 외우는 개기름 줄줄 흐르는 목사들의 말은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남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건 기세다. 내가 하는 말이 맞냐 틀리냐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머니가 지금까지 성령이 충만하다고 칭찬한 목사들 모두 다 나중에는 "좀 아닌 거 같다"로 끝났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새로운 누군가를 찾아냈다. 지금은 유튜브에서 전광훈 목사의 설교를 매일 듣는다. 나이가 들어 귀가 안 좋아지셨는지 티비 볼륨을 크게 올려서 우리 집에서는 전광훈과 그 옆의 엉터리 영어통역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때가 많다.


어머니는 항상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미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한인 교회 청년부를 가보면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자기 인생은 시궁창에 처박고 있는 사람들이 득시글하다. 하긴 인생이 안 풀리니까 교회에 오는 것이겠지. 이렇게 열심히 믿는데 언젠가는 하나님이 알아 주실테니 나는 걱정 없어하는 표정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20년 뒤에도 겨우 먹고사는 정도이고 지금도 그들의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캐나다의 영세한 이민교회와는 달리 한국의 대형교회는 조금 다르게 운영된다고 들었다. 사랑의 교회 같은 곳에서는 대학 청년부도 소속 대학별로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연대생들은 연대끼리, 고대생들은 고대끼리... 대학 못 갔거나 지잡대 다니는 놈들은 그렇게 걸러지는 것이다. 한국 교회들은 확실히 장사수완이 좋다. 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몰랐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교회학교서 주입식으로 배웠던 교리들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씀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또래의 이민 1.5세들은 이제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시기다. 그들은 나에게 "우리 엄마 아빠들은 이민 와서 먹고사느라 바빠서 우리들한테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 식견이 너무 짧아져서 인생을 살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 적이 많아, 나는 그래서 우리 애들한테는 이것저것 많이 경험을 시켜주고 싶고 하고 싶단 게 있으면 무리해서라도 해 주려고 해"라고 말한다. 그럴 때면 너희들은 나보다 훨씬 잘 살았는데도 나처럼 부모 탓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섭섭했던 것만 기억을 잘 한다. 그들은 20대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놀아대면서 젊음을 즐겨야 한다고 했다. 이제 그들의 아이들이 자기들처럼 되어가는 걸 보니 기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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