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지난 몇 달 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키우는 개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골든 리트리버와 그레이트 피레니즈 잡종인 우리 개는 올해 14살이 넘었다. 몇 년 전 인대가 끊어져 더 이상 뛰어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밖에는 건강한 개였다. 그런데 작년부터 살이 빠지고 기운이 아주 조금씩 줄어들었다. 가끔 옛날이라면 문제없을 음식을 먹고 나서 설사를 하거나 토했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수의사에게 개를 데려갔다. 수의사는 이때까지 살아있는 게 대단하다면서 약을 처방해 줬고 그때마다 개는 나아졌다.
지난 3월의 어느 날 개는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에 대소변을 보러 갔는데, 한참 걸려도 돌아오지 않길래 밖을 내다보니 뒷다리를 쓰지 못한 채로 멀거니 앉아 있었다. 개는 평소에도 관절염이 심하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에 뭔가 악화됐구나 하고 얼른 데려와서 눕히고 약을 먹였다. 죽도 끓여다 입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쉽사리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다. 손만 대도 아프다고 으르렁 거렸고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런 와중에도 대소변은 꼭 가려야겠는지 뒷문을 눈짓으로 가리키면 우리는 개를 안아다 마당 풀밭에 내려놓았고 개는 젖 먹던 힘으로 용변을 보았다. 그리고 멍한 눈빛으로 다시 들여놔 달라고 우리를 쳐다봤다.
수의사에게 다시 데려갔다. 수의사는 개들은 아픈 걸 숨기기 때문에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다른 검사는 해봤자 다 필요 없고 굳이 필요하다면 엑스레이나 피검사 정도가 적당하다고 조언했다.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개의 폐에는 큰 종양이 있었다. 그보다 작은 혹들은 개의 몸속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수의사는 폐에 혹이 있으면 이건 암이건 아니건 치명적이고 더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곧 종양이 퍼질 것이고 개가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안락사를 하러 오라면서 견적서를 내주었다. 개 장례에도 옵션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를 받을 것인지, 개 발바닥이 찍힌 도자기도 살 것인지 골라야 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돌아오며 그럼 그동안 못 먹었던 고기나 맘껏 주자하고 소고기와 닭고기를 삶았다. 그러나 병에 걸린 개에게 예전 같은 식욕은 없었다. 예전에 좋아하던 음식인데도 입에 대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우리는 온갖 사료를 다 사서 테이스팅을 시켰고 집에서 재료를 사다가 만들어서 먹이기도 했다. 그래도 개는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다. 개의 뒷다리는 시간이 지나자 점점 나아지는 듯싶다가 갑자기 한쪽 다리를 이상하게 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수의사에게 데려가는 건 의미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한번 더 데려가서 진통제도 사고 다리도 봐 달라고 했다. 검사해 보니 뒷다리에 큰 혹이 생겨서 그게 뼈를 갉아먹고 있었고 약해진 뼈가 그만 부러졌던 것이다. 나는 개가 지금 많이 아프냐고 물었다. 수의사는 “개는 고통을 대하는 방식이 사람과 다르다” 고 말했다. 실제로 개는 아직도 산책을 좋아했고 맛있는 과자를 보면 달라고 꼬리를 쳤다. 물도 많이 마시고 안마를 해주면 다리를 길게 펴고 편하게 누웠다. 나는 이번에도 안락사를 시킬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개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는 정신이 말짱하고 집 안을 절룩거리며 돌아다닌다. 개는 더 이상 그릇에서 밥을 먹지 않고 내 손에서만 먹이를 받아먹는다. 산책을 아직도 좋아하는 개를 위해서 카트를 장만해서 산책 대신에 태우고 다니고 있다. 개는 카트를 매우 좋아한다. 저녁이 되면 자러 가자고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매일매일 개를 관찰한다. 어제보다 더 아파하는지, 어제보다 덜 먹었는지, 어제보다 더 피곤해하는지 기록한다. 상태가 나빠지면 수의사에게 데려갈 결심이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은 거 같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지는 모른다.
개는 사람으로 치면 여든이 넘은 나이다. 살 만큼 살았고 언제 죽어도 아쉽지 않다. 암세포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온몸으로 퍼질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고 산책 가는 줄 알고 꼬리를 치는 개를 차에 싣고 동물병원으로 가야 할 것이다. 개는 몇 시간 후 한 줌의 재가 되어 내 방 책상 위에 올려질 것이다. 올해 초만 해도 살만 조금 빠졌을 뿐이지 건강하던 개가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많은 경우 죽음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밴쿠버에서 우리와 같은 동네에 살던 S라는 누나가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았는데, 그 집과 우리는 같은 교회를 다녔고 그 누나와 나는 같은 중학교를 다녔었다. 누나는 미모가 출중해서 많은 교포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주위에는 항상 남자가 끊이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은 그 누나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수줍어했다. 그러나 나는 옛날부터 누나들과 쉽게 친해지곤 했었기 때문에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농담도 많이 했다. 그렇다고 연락해서 만나는 사이까지는 되지 않았고 어쩌다 마주치면 반갑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정도였다. 그 집은 딸만 셋이었는데 셋 다 예쁜 편이었고, 부모는 누나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밴쿠버에서 차로 하루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식료품점 비즈니스를 시작했기 때문에 주말에 가끔 밴쿠버에 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지만 평소에는 그 집에서 애들끼리만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 집은 애들에 관심이 없나 봐, 딸 셋만 놔두고 자기네들끼리 딴 데서 살고. 하는 말들이 오갔다.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남의 사정은 그렇게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부모 없이 자기네들끼리 사는 틴에이저들은 별로 거칠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일설에는 누나를 두고 중국 갱단의 깡패와 한국애가 맞붙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누나는 결국 중국 깡패의 차지가 되었고 가끔 동네에서 양아치스럽게 꾸민 일본 스포츠카 조수석에 타고 있는 누나를 볼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누나의 화장은 점점 진해졌지만 나는 그런가 보다 했고 토론토로 이사 가면서 그 누나의 근황도 더 이상 듣지 못했다.
1학년을 마치고 돌아오자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누나가 어쩌다 암에 걸렸는데 곧 죽는다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가 목사님에게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방탕하게 살았는지 고백하면서 눈물의 회개를 했다는 이야기도 교회에 퍼졌다. 그런 건 아무도 모르게 단 둘이서만 나누는 이야기일 텐데 어쩌다 온 교회에 그 이야기가 퍼졌을까 궁금했지만 사실 한인교회란 데는 아침드라마 뺨치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여름이 지나고 내가 대학 2학년일 무렵 누나는 죽었다. 나의 친구들 몇이 장례식에서 관을 들었는데, 후일담으로 관에 누워있는 사람은 그 누나가 아니라 뭔가 기괴한 괴물 같았다고 했다. 암이 마지막 남은 생기 한 방울까지 뽑아가고 나서야 숨을 거둔 모양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장례식에서도 처녀가 걸릴 암이 아니었다며 수군거렸다. 지금이라면 예방주사로 막을 수 있는 암이었다. 예전의 남자친구들도 장례식에 와서 다들 오열했다고 한다. 저렇게 젊고 예쁜데 벌써 죽다니…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젊어서 죽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모두들 와서 슬퍼해 주고 아쉬워해 주었다. 심지어 전 남자 친구들까지 와서 다들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리고 솔직히 살아있는 동안 예쁜 젊은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살았다. 사람들은 “너무 일찍 죽었어, 더 살았더라면 이것저것 더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라고들 했지만 그건 남겨진 사람들의 생각이지 죽은 사람이 아쉬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은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죽고 나서 “아, 이렇게 오래 살아서 인생 본전 뽑았으니 남는 장사였어” 하고 뿌듯해할 일은 없다. 죽으면 끝이니까.
가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20대에 죽지 않고 살아온 지난 20여 년이 넘는 세월이 정말로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20대 때 누군가 나에게 “넌 50이 될 때까지 이렇게 살게 될 거야” 하고 나의 미래를 미리 이야기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시시한 인생이지만 그래도 난 죽는 건 무서우니 어떻게든 버텨야 겠어, 가끔 좋은 일도 생기겠지.”라고 답했을까 아니면 “에이 기껏 이렇게 살려고 앞으로 20년을 더 아등바등 일해야 한단 말인가? 뭐 그럴 바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