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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1995

by 그런인생

개가 죽은 지 이제 한 달이 되었다. 매일 사료를 갈아서 부드러운 음식과 같이 손바닥에 올려놓아 먹이고 산책 대신 카트에 태워서 바깥 구경을 시키고 잘 시간이 되면 안아서 2층으로 올라가는 날들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석 달 정도는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혈액검사 결과가 나쁘지 않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은 개를 둔 견주들은 대부분 생각이 비슷하다. 사료를 매일 조금씩 덜 먹기 시작해도 ‘그래도 오늘은 이만큼 먹었잖아, 나쁘지 않아’ 하고 생각하거나 그릇에 있는 사료를 먹지 않아도 ‘그래도 손으로 먹이니까 잘 먹잖아,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현명한 견주들은 개가 많이 고생하기 전에 병원에 일찍 데려간다.


어느 날 개를 안아다 자리에 눕히고 나서 보니 팔에 피가 묻어있었다. 개의 털 속 감춰진 혹에서 난 출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이틀 후에야 알았다. 나는 이제 데려가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그간 며칠 동안 걷는 것도 부쩍 버거워했다. 그날 밤 개는 유난히 심하게 헉헉거렸다. 왜 그러니 하고 다가가자 개는 나에게 기대어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숨을 가쁘게 쉬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나는 얼음찜질을 해 주었고 얼마 후 열이 내리자 다시 개는 잠을 잤다. 그러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이틀만 더 있다 병원에 데려가면 안 되냐고 아내가 물었지만 나는 ‘얘가 많이 아파’ 했고 아내는 알아들었다. 개는 낮보다 밤에 더 아파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회사를 쉬었고 좋아하는 맥도널드 감자튀김과 휘핑크림을 먹였다. 그러고 나서 뒷마당에서 일광욕을 시키면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별로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개는 헉헉거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개와 같이 뒷좌석에 탄 아내가 “오늘 응가를 안 했는데” 하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았었기 때문에 병원 근처 공원으로 가서 개를 풀어주었고 개는 새로운 곳의 흙냄새가 좋은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아주 많이 용변을 보았고 홀가분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멀리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죽기 전에 시원하게 일을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물병원에 도착하자 접수하는 곳에는 초가 켜져 있었다. 이 병원에서는 안락사를 시행할 때 항상 초를 켜고 방문자들에게 조용히 할 것을 부탁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병원을 드나들면서 언젠가는 우리 개를 위해서 이 초가 켜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날은 오늘이었다. 푹신한 담요가 깔린 테이블에 개를 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 개는 병원을 아주 싫어했고 내려놓기만 하면 도망치거나 나에게 안기기 바빴다. 그런데 오늘은 웃는 얼굴로 편하게 드러눕는 것이었다. 집 밖에서는 절대로 그런 자세를 취한 적이 없었다. 오늘 긴 고통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의사가 잠깐 생각을 하더니 마지막으로 몸무게를 재자고 했다. 개를 안아 들자마자 그 순간 나의 맥박이 갑자기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스마트워치는 내 맥박을 190으로 표시했다.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할 수 없이 나는 바닥에 누워야 했고 테이블 위의 개는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보지 못했고 대신 아내가 개를 안아주고 있었다. 첫 번째 주사 이후 개는 편안하게 잠을 자기 시작했고 두 번째 주사를 찌르자 단잠을 방해받은 개는 짧게 으르렁거렸으나 이내 다시 잠에 빠졌다. 개의 심장박동은 한참 뒤 멈추었다. 아버지의 임종 때와 달리 개는 심장이 멈춘 후 한참 뒤에도 몸이 따뜻했고, 아직도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자고 있었다. 수의사가 개의 입술 끝을 아래로 내리자 입술은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입 근육이 풀린 것을 확인한 수의사는 이제 다 끝났다며 조의를 표하고 방을 나갔다. 우리는 개를 십 분 정도 쓰다듬었고 그러다가 털 속에 감춰져 있던 피맺힌 혹들을 몸 여기저기서 찾았다. 우리 개는 14년을 산 개답게 눈치가 비상했다.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고 할 일을 다 마친 듯한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도 그러기는 힘들다.


사람으로 치면 거의 아흔까지 산 셈이다. 하지만 아흔까지 살아도 웬만한 사람들은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한다. 백세시대라고 떠들어대는 이면에는 오래 살고 싶다는 집념이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늙으면 점점 추해진다는 것이다. 내 또래의 친구들을 봐도 아직 오십도 되지 않았지만 몇 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늙어 보인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긴 것만 꼴 보기 싫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도 망가져 간다. 나이가 먹으면 고집도 세지고 행동도 느려진다. 게다가 주책도 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는 상속문제를 처리해 줄 수 있는 변호사가 필요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친한 친구의 아들이 변호사라며 연락해 보라고 했다. 아는 사람을 동원해 봤자 별로 도움 될 게 없다고 나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전화를 드려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저씨는 사실 자기 아들이 변호사를 그만두고 이번에 지방검사가 됐다고 했다. 아 그렇습니까 하고 끊으려 하자 아저씨는 나를 붙잡고 자기 아들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는 검사가 되기가 아주 어렵고, 걔가 그래서 요새 바쁘다며 이십 분 넘게 혼자 떠들었고 나는 적당히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었다. 늙었다는 건 그런 것이다. 지난주에 아버지를 잃은 사람에게도 자기 아들 자랑을 하지 않으면 몸이 달아서 어쩔 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어진다. 노인들이 오래 살고 건강한 사회는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다들 때가 되면 알아서 비켜 줘야 사회가 발전을 하는 것이다. 그게 자연의 이치였지만 이제 과학이 발달한 지금 인간은 백 이십 세 수명이니 영생 프로젝트니 하면서 죽음을 거부하려 한다. 죽을병에 걸리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게 옳은 일일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들 지금 이대로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십 대의 아이들은 절친과의 우정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흔 살 노인이 수십 년 후에나 개발이 될 땅을 사기도 한다. 아버지는 생전 서랍 속에 이백만 원 남짓의 돈을 비상금으로 넣어놓고 아까워서 죽기 전까지도 쓰지 못했다. 아버지는 심장의 기능이 삼분지 일로 줄어들어서 언덕도 걸어 올라갈 수 없는 몸이었지만 내년에는 뒷마당에 뭘 심어야 할까, 내후년에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야 하는데. 하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는 뒷마당 세 바퀴만 걸어도 숨이 차잖아요, 무슨 성지순례예요, 그냥 지금 돈 쓰고 싶으신데 쓰세요, 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계절은 항상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계절에 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밴쿠버에 살 때 같이 몰려다니는 열 명 남짓의 또래 한국인 친구들이 있었다. 나와 몇몇 아이들이 대학 때문에 밴쿠버를 떠나게 되자 무리 중 누군가가 “야,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엄청난 인연인데, 우리 우정 평생 변치 말자” 며 10년 후에 각자 성공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히 10년 후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자고 굳게 맹세를 하고 큰 도화지에 각자 한 마디씩 적고 그걸 10등분으로 찢어 나누어 가졌다.


“10년 후 우리 모습이 궁금하지 않냐, 다들 한 자리씩 꿰차고 있겠지? 기대된다” 다들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그때는 옆에 와이프도 각자 데리고 나타나자고 시시덕거렸다. 시간이 지나고 각각 다른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이들은 아주 조금씩 서먹해졌다. 누군가는 한국에 돌아가서 취직을 했고 미국으로 떠난 사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밴쿠버에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0년 후 약속한 날짜에 나는 토론토에 있었다. “지구 어디에 있더라도 그날은 여기로 오는 거다” 하던 누군가의 말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몇 년 후 나는 그중에 한 명을 토론토에서 만났다.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그 약속이 기억났고 그는 그 시간에 그 자리에 갔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또 누가 나왔었어?” 내가 묻자 그는 “야 아무도 안 나오지 오겠냐” 하고 낄낄거렸다. 그 무렵 페이스북이 등장했고 마음만 먹으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과 모두 연락할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든 건 그때 가봐야 아는 것이고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 개는 지혜로웠다. 먹을 것을 주면 미래를 위해서 아껴두지 않고 항상 맛있는 것을 제일 먼저 먹었다. 어제 아무리 혼이 났어도 오늘 잘 놀아주면 꼬리를 흔들면서 행복해했다. 그리고 죽을 때가 되자 음식을 거부하고 조용히 마지막을 기다렸다. 온갖 난리를 치면서 먹을 것을 입에 쑤셔 넣고 병원에 데려가면서 석 달 동안 죽음을 늦춘 건 개가 아니고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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