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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는 쉽지 않다 - 1

1995

by 그런인생

여름이 지나고 2학년이 되었다. 이번 학기에는 기숙사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그 ‘조금의 노력’이 싫었다. 사람들과 신나게 떠들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서면 외롭다는 생각보다는 여긴 조용해서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니체가 말했듯 무리 지어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 나이대 학생들이 흔히들 하듯 여럿이 사는 집에서 방 하나에 세 들어 사는 것 - 당시에 프렌즈라는 시트콤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그런 생활에 로망이 있었다- 도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원룸을 구하기로 했다. 당시 시세로 방 하나를 빌리면 최소 월 300달러였고 원룸 아파트는 최소 600달러였다. 300불에 행복을 사는 셈 쳤다. 그전까지는 집을 알아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는 잘 몰랐다. ‘돈 주겠다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어’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철딱서니가 없으면 자기가 잘 모르는 건 다 쉬워 보인다. 현명한 사람은 잘 모르는 상황이 닥치면 알아볼 수 있는 건 다 알아보고 나서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지만 이런 건 배워야만 알게 된다. 일반적인 한국 부모들은 실생활에 필요한 지혜는 별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쯤에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운다. 이제는 그 나이대가 30대 중반이라고 들었다. 다들 요새 애들은 고생을 몰라서 큰일이라고 한탄하면서도 자기 자식을 고생시킬 마음은 없다. 판검사나 의사 빼고는 자신의 직업을 자식들도 가지기를 원치 않는다. 자기가 잘 모르는 건 다 쉬워 보이기 때문에 모두들 자기가 제일 힘들게 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인생이란 평생 편하게 살면서 좋은 것만 보고 아무 일도 안 하고 사는 것이다. 아손 그렙스트란 스웨덴 작가는 구한말 조선을 여행하면서 어떤 일본군 장교가 조선에 대해 악담을 했던 기록을 남겼다. "조선에서 '일'이란 슬픔, 불행, 재난 등을 의미합니다, 조선인들은 겁이 많아서 모험심도 없고, 단지 바라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일본인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입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부모님은 내가 알아서 집을 구하겠다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인들도 일이 바쁘고 영어도 못하는데 자식 자취방까지 알아볼 여유는 없었다. 다행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무관심한 부모를 가진 게 장기적으로는 득이 된다. 혼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어릴 때부터 배우니까. 주위 지인들 중 그나마 사람 구실 하면서 제대로 사는 사람들은 다 그런 경험이 있다. 뭐 유년기의 트라우마 이런 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트라우마 없는 인생이 꼭 낫다고는 보기 힘들다. 어떤 건 트라우마가 제대로 박혀야 나중에 더 험한 꼴 당하지 않는다. 그놈의 트라우마 갖고 징징거리는 것도 다들 배가 불러서 그렇다.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방을 알아본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밴쿠버로 떠나기 전 부랴부랴 길거리에 있는 신문박스에서 렌트 책자를 가져와서 괜찮은 곳에는 다 동그라미를 치고 일일이 전화를 했다. 기말고사가 끝나는 대로 밴쿠버로 가야 했기 때문에 토론토를 떠나기 전에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했다. 기말시험도 준비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학기에 살 곳을 정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예산으로 좋은 집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월세가 싸면 위치가 좋지 않거나 불결한 건물이었고, 멀끔한 곳이면 가격이 비쌌다. 예산은 올려야 했고 내 기준은 낮춰야 했다. 나는 막연히 사진으로 봐서 깨끗하면 진짜로 그렇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에 가서 볼 때마다 실망을 했다. 게다가 나는 눈치도 없어서 더 애를 먹었다. 당시에는 싸구려 위스키 한 병을 들고 가서 관리인에게 집 보러 왔다고 건네주면 없던 빈방도 생기는 그런 시대였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토론토대학 근처의 오래된 원룸 아파트를 계약했다. 운이 좋았다. 그때는 토론토에서 월세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기 시작 일주일 전에 토론토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날은 일정이 빡빡했다. 자칫 잘못하면 길에서 자야 할지도 몰랐다. 이민가방 가득 짐을 싣고 공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렌털아파트의 사무실을 찾아간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오피스가 닫는 시간은 5시였다. 비행기가 늦어졌다던지 길이 막혔다던지 하면 낭패였을 것이다. 나는 내가 세운 계획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까지 해본 적이 없었고 그제야 나는 세상에는 많은 변수가 있다는 게 실감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친절하지 않았다. 좋은 말 하려고 임대아파트 사무실을 방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이 샌다던지, 렌트비가 밀렸다던지, 뭐 그런 용무로 온 사람들이 내 앞에서 찌든 얼굴로 어두운 조명 아래서 구차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고 직원들은 영혼 없는 눈빛으로 그들의 말을 끊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광경을 자주 보는 것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쨌든 열쇠를 받았다. 이제 적어도 노숙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내가 살 아파트는 사무실에서 한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배낭을 메고 이민가방을 질질 끌면서 무더운 9월의 오후에 토론토의 듀폰 거리를 걸어갔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배도 고픈 데다가 혹시 열쇠를 잘못 받아왔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살짝 들었다. 후에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다른 지인들은 내가 어쩌다 이런 고생을 하게 됐을까 하고 길거리에서 울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내가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문제가 생기면 난 그것만 생각한다. 한가하게 팔자를 한탄할 여유는 부리지 않는다. 울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쩔 건가?


아파트에 들어서자 나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엄마가 이민가방 속에 넣어준 김치통이 새지 않았어야 할 텐데. 걱정하며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은 생각보다 훨씬 낡았고 카펫에서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가 났다. 목욕을 오랫동안 하지 않은 사람이 다이소에서 산 향수를 뿌린 것 같은 그런 냄새였다.

내 집은 5층이었다. 한 10평 정도 되는 공간이었다. 냉장고와 스토브는 오래됐긴 했지만 작동은 잘 됐고, 물도 잘 나왔다. 베란다도 있었다. 그런데 전 세입자가 새를 좋아했는지 베란다는 비둘기 똥으로 덮여 있었다. 저기 나가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곳에서 한 9개월 사는 동안 베란다에 나가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베란다 아래는 쓰레기장이어서 여름이면 냄새가 많이 나서 그렇기도 했다.


집안을 둘러보다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두어 마리 잡았다. 원래 그런 임대아파트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바퀴벌레들이 몰린다. 잡을 사람이 없으니까 다른 곳에서 밥을 먹고 와서 쉬는 것이다. 처음 2주 동안에는 바퀴벌레를 한 백 마리 넘게 잡았다. 그 후에는 가끔 눈치 없는 애들 몇 마리만 간간이 보였다. 벌레정도야 문제가 될 건 아니다. 나는 바퀴벌레보다 힘이 세니까 잡으면 그만이다. 바퀴벌레는 전갈이나 말벌이 아니니까 몇 마리 있다고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된다. 땀에 절은 채로 잘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샤워를 했다. 샤워커튼이 없어서 건식 화장실이 물바다가 되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챙겨 온 여행용 비누로 머리도 감고 샤워도 했다. 샴푸와 샤워커튼도 사야겠구나.


그날 저녁 인근 마트에 가서 우선 화장지, 샴푸, 비누, 청소도구들을 샀다. 코로나 때도 캐나다 마트에서 제일 먼저 동난 물건은 화장지였다. 화장지가 넉넉하면 왠지 부자가 된 느낌이다. 돌아오는 길에 사들고 온 햄버거로 저녁을 먹었다. 생각해 보니 쓰레기통도 없다. 적어놔야겠다. 대충 요기를 하고 겉옷을 말아서 베개를 만들고 가져온 수건 몇 장을 덮고 마룻바닥에서 잠을 잤다. 설마 바퀴벌레가 귀나 콧구멍으로 들어오진 않겠지 하고 살짝 걱정이 됐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고 텔레비전도 없었기 때문에 집안은 무시무시하게 조용했다. 밤이 되니까 춥네. 내일은 이불을 사야겠어, 하고 다짐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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