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다음날 아침 나는 이불보다도 커튼이 더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파트는 동향이어서 오전 6시부터 온 집안이 환해졌다. 햇빛이 그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아침부터 집안이 더웠다. 자취를 하려면 필요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막연히 뭔가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일이다. 당장 오늘 저녁에 아파트 입구에서 내 또래의 아름다운 여학생에게 실수로 부딪히고 통성명을 한 뒤 사과하는 의미에서 내가 저녁을 대접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내 기억으로 그런 일은 딱 한 번 있었다. 그나마 내가 눈치가 없어서 만나자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불발되었다. 하늘이 도와줘도 내가 눈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여자들은 좀처럼 대놓고 "당신 괜찮은데 우리 같이 놀자"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소통하기에 많은 불편이 있다.
아침 일찍 다시 빈 이민가방을 들고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Canadian Tire라는 잡화점에 갔다. 한국의 다이소 같은 곳이다. 여기서 그릇, 컵, 접는 의자, 쓰레기통, 접는 식탁 따위들을 사서 그걸 질질 끌고 아파트로 돌아갔다. 택시를 타면 쉬웠겠지만 한 푼이 아쉬운 시점이다.
그러고 나서 The Bay라는 백화점에 가서 매트리스 커버와 이불을 샀다. 다행히 이곳은 큰 비닐봉지를 준다. 오늘은 수건과 옷가지 대신에 이불을 제대로 덮고 잘 수 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산다.
오전이 그렇게 지나갔다. 뭔가 거하게 먹어야 힘이 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괜히 비싼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 한 달 렌트 650불을 내고 나면 350불로 생활해야 한다. 비상금이 얼마 있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사치는 피해야 한다. 나는 맥도널드에 들어가 빅맥 세트에 치즈버거를 하나 더 추가했다. 이 정도면 해가 질 때까지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는 빈 컵을 가져가서 콜라를 리필해 달라 그러면 군말 없이 채워줬다. 맥도널드에서 일하면서 얻은 노하우다. 콜라도 두 컵이나 마시고 숨을 돌리니 살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한인타운 입구에 있는 가구점으로 갔다. 작년부터 눈여겨본 가게였다. 제대로 된 침대는 비싸지만 futon이라고 접이식 나무 프레임 위에 매트리스를 얹어놓고 소파로 쓰다가 펴서 침대로 쓸 수 있는 가구가 있다. 가격도 침대와 매트리스보다 저렴한 399달러였다. 나에게 디자인 같은 건 아무 상관이 없었고, 그냥 제일 두껍고 제일 싼 모델을 골랐다. 친절한 점원이 사정을 봐주어서 배달은 다음날에 받기로 했다. 그 정도면 캐나다에서는 엄청나게 빨리 받는 것이다. 재고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루만 더 바닥에서 자면 된다. 이 정도면 다행이다. 그런데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아. 커튼을 사지 않았구나. 커튼을 달려면 연장이 필요한데… 다시 아침에 갔던 Canadian Tire에 가서 제일 싼 10달러짜리 공구세트와 샤워커튼 그리고 암막 커튼을 샀다. 그런데 집을 나설 때 이걸 어떻게 매달아야 하는지 확인하지 않고 나왔다. 커튼레일이 있었던가? 아니면 봉을 달아야 하나? 하는 수 없이 다시 집에 가서 천정을 확인하고 거기에 맞는 부속을 사 왔다.
미리 생각을 해뒀으면 한 번이면 될 걸 세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해야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인 게 다행이다. 내일이면 침대도 올 것이고, 식탁 겸 책상으로 쓸 테이블도 구했고, 베개도 있고 이불도 있다. 언젠가는 책상을 사야 할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나중에 차를 갖고 있는 아는 한국인 형에게 부탁해서 IKEA를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맨입으로 부탁하긴 그러니까 밥이라도 한번 사줘야겠다. 나는 남에게 부탁하는 것을 매우 꺼리고, 어쩌다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절대로 공짜로 부탁하지 않는다. 그런 건 자존심 없는 거지새끼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데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이건 한국인이고 캐나다인이고의 차이가 아니고 그냥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남을 공짜로 부려먹으면 그게 돈 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핑계도 가지가지다. 우리 사이에 그런 거 하나 못해주냐, 어른이 시키는데 예 해야지, 어머 달란트를 갖고 계시는데 이웃을 위해 쓰셔야 하나님이 복을 주시죠 등등.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제 내 주위에 남은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은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 몇십 년이 걸렸다. 세상은 싼값에 남의 노력을 후려치려는 사람들과 대가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사람들 간의 영원한 투쟁이다.
이제 저녁이 되었다. 오늘은 생산적인 하루였다. 다음 주에 학기가 시작이지만 이런 식이면 사나흘 안에 집정리는 끝날 것이다. 그럼 며칠간의 여유가 있다. 내일은 유선전화를 신청해야 한다. 지나다니다 전화국 지점이 어디 있는지 보아뒀으니 거기에 가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공중전화로 부모님에게 상황보고를 해야 한다. 밖에 잠깐 나가서 신용카드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필요한 거 이것저것 사고 청소도 했어요. 침대는 내일 온대요. 그러냐, 할만하냐, 네. 그래 그럼 자기 전에 기도 꼭 하고 성경을 읽고 자라. 네. 장거리전화는 일분에 일 달러씩 나가기 때문에 통화를 길게 끌면 안 된다. 수화기를 내린 뒤 시계를 봤다. 삼 분 정도 통화를 했다. 3달러면 나쁘지 않다.
점심은 사 먹었으니 저녁은 집에서 만들어 먹어야겠다. 어머니는 자취하려면 가재도구들이 많이 필요할 테니 가져가야 한다고 집에서 더 이상 쓰지 않는 낡은 물건들을 내 이민가방에 열심히 쑤셔 넣었다. 와서 꺼내보니 그래도 의외로 요긴한 물건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어머니가 신혼 때 들고 온 밥솥도 있었다. 그래 오랜만에 밥을 지어야겠구나. 아 그런데 쌀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나가야 한다.
한인상점은 걸어서 20분쯤 걸렸다. 그래 운동도 할 겸 가볍게 쌀 20킬로 정도만 사 오자. 나는 쌀을 넣고 매고 올 요량으로 배낭을 들고 갔다. 주인아줌마는 내가 학생이어서 그랬는지 쌀과 라면을 사는 나에게 껌 한 통을 서비스로 줬다. 고마웠다. 앞으로 쌀은 여기서만 사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배낭은 생각보다 작아서 쌀이 들어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라면이 든 배낭을 메고 쌀을 어깨에 짊어지고 걸었다. 날씨는 더웠고 쌀은 생각보다 많이 무거웠다. 20킬로가 어느 정도인지 나는 그때야 알았다. 그 무렵 한국의 한 여성 탐험가가 40킬로의 짐을 지고 여행을 다녔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보다 힘이 훨씬 센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목이 많이 말랐다.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쌀을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콜라라도 한 병 사 먹고 갈까. 아니야 조금만 참으면 1달러를 아낄 수 있어. 앞으로 자주 이렇게 지고 다닐 텐데 그래도 이력이 나면 좀 쉽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주 해도 점점 더 힘들어지는 일도 있다.
20년 된 도시바 밥솥에 쌀을 씻어 넣고 물을 딱 1.5배를 넣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봐, 밥솥에 손을 이렇게 넣고 손목까지 잠길 정도로 물을 넣으면 되는 거야' 했지만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물이 쌀의 부피의 딱 1.5배일 때 밥이 적당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계속 그렇게 밥을 지었다. 그때의 난 정확히 얘기하지 않으면 잘 알아듣지 못했다. 밥이 다 되었고 가져온 김치와 김으로 저녁을 먹었다. 왠지 맥도널드보다 나은 것 같았으나 단백질이 필요했다. 인근 마트에 가서 베이컨을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베이컨은 내가 아는 가장 싼 육류였다. 그게 서양 삼겹살 아닌가. 그 후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김치, 김, 베이컨, 한인마트서 산 밑반찬 하나, 그리고 아주 시간이 남아돌 때면 국도 끓였다. 나는 항상 왜 내가 끓인 국들은 소금을 넣어도 싱거울까 생각했고 삼 년 후에야 그 원인을 알았다. 육수의 개념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맛에 까다롭지 않은 나는 뭐 이 정도면 됐지 하고 항상 맹물에 끓인 국을 먹었다.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발전도 없다.
밥을 다 먹고 나자 그제야 내가 땀에 절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워를 했다. 어제와 달리 샤워커튼 덕에 마음 놓고 물을 뿌렸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었다. 자 이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빨랫감은 세탁기에... 그제야 나는 집 안에 세탁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