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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bootsbookclub Jan 13. 2021

소설, 신비한 태블릿  / 지연

redbootsbookclub_magazine vol.1


시간은 많은 것을 무르익게 만든다.
건망증도 무르익는다.

40대 중반에는 머릿속이 까맣게 되어 할 말을 잊는 일이 많아져도 콧방귀를 뀐 오여사다. 50대가 되니 조금씩 두려운 일이 되고 있었다. '응, 으, 그거 왜 있잖아......' 아줌마들이 모이면 시작하는 그 말이 접속어이자 후렴구가 되는 지경에 이르도록 말이다. 어릴 때부터 덤벙거리면서 한꺼번에, 많은 것을, 빨리 처리하려는 오여사의 습관은 늘 뭔가 빠뜨리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학교에 가면 교과서 하나쯤 빼먹어 버렸고 집에 돌아가면 숙제할 공책을 학교에서 가지고 오지 않기 일쑤였다. 그런 건 괜찮았다. 조금 불편했고 잠시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엄마는 '너는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애 같다.'라고 자주 핀잔을 줬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하지만 요즘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말을 잇지 못하는 오여사는 조금 심각하다. 오여사는 독서모임의 진행자다. 독서모임에서는 차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모임의 텍스트는 '어떤 경우라도 제 생각은요.'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논리적으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방법에 대한 실전서이다. 무슨 박사급으로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할 말을 잘 알아듣게 풀어서 말할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히 자신있었다. 건망증이 문제다. 모임 전부터 긴장감이 몰려와 걱정이 되었다.

“논리라는 것이 현학적인 단어들을 동원해서 말을 화려하게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이죠. 자신이 전달할 의견을 쉽게 간결하게 말하는 게 더 핵심이겠죠."

다른 사람들 말에 끼어 덧붙이고자 했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

'뭐더라, 많이 쓰는 단언데......' 마치 머릿속에서 뭔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다. 회전목마를 타고 도는데 뭔가 잡으려고 손을 뻗지만 너무 빨라서 잡을 수가 없다. 영화의 영상처럼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모습이 겹쳐지고 뭉개져있다. 그것이 배경이다. 돌고 도는 세상, 나보다 더 빨리 도는 세상, 채 따라가지는 못하고 정신없이 돌기만 하는 세상이다. 똑 부러지는 젊은 회원들이 이야기를 주도하도록 하며 토론을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점심을 먹으러 들어와 있었다.

"왔어요? 밥 먹어. 그거 뭐지? 콩알 동동 떠 있고 두부랑 골라먹으면 고소하다고 좋아하잖아."

남편은 의아한 얼굴로 식탁으로 가서 냄비 뚜껑을 연다.

"청국장이네."
"아, 맞아, 청국장. 내가 당신 먹으라고 끓여놨어."

별 게 다 생각이 안난다고 혼잣말을 하며 밥을 먹는데 남편이 흘리듯 말한다.

"이따가 3시에 사람들이 올거야. 그림 비싼 거 하고 노트북이랑 애들 악기 정도만 치워놔."
"응? 사람들이 누군데?"
"법원....... 그냥 형식적인 거야."

법원이라고......? 앞 뒤 설명 다 잘라내고 뜬금없는 그 말이 한참 후에야 이해되었다. 남편의 사업빚 때문에 생긴 일, 말로만 듣던 일이다.

"아, 그거? 연속극에 자주 나오는 거? 빨간 딱지 붙이고, 막 사람들이 몰려와서......"
"......"

늘 그랬듯이 남편은 대꾸가 없다. '뭐였더라? 빚 못갚았다고 집안 물건 다 뒤집고, 집주인 도망가서 남아 있는 여자들이 머리채 잡히고, 아이들은 울고...... 아, 뭐더라?' 이런 상황에서 단어가 생각이 안난다니, 텔레비젼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일어날 일인데 말이다.

"지금 당신이 말한 걸 뭐라고 하더라?"

대답없이 현관문을 나서는 남편의 등 뒤로 그 상황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펼쳐지기 시작한다. 오여사 자신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헝클어진 머리와 흐트러진 옷매무새, 하지만 평정을 잃지 않은 고고한 표정과 침착한 목소리여야 한다. '제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될까요?' 표정 좋고 목소리 좋네...... 남편이 나가며 대문 닫는 소리와 겹쳐 생각이 났다. '압류', 그 단어는 압류다. 빚을 못 갚으면 뭐라도 팔라는 협박이다. 오여사는 남편이 말한 물건들을 차에 싣고 어딘가를 빙빙 돌다가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컴퓨터, 냉장고, 김치냉장고 등에 빨간 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남편은 별 거 아니라며 방으로 들어갔고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간듯 팔다리가 저려오는 통증에도 오여사는 애써 불안을 삼켜보았다. '그까짓 거...... 또 사면되지 뭐.'

다음 날 오후와 저녁 사이 한참이 지나서야 허기 때문에 소파에서 일어났다. 사실은 빨간딱지가 붙여진 싸구려 물건들은 다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새 걸 사기는 커녕 다 뺏겨 버리고 더 어둡고 좁은 집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밤새 오여사를 쫓아다닌 불안이 그것이었다. 불안이 가슴에 뭉쳐 등을 다 펴지도 못한 채 엉금엉금 일어난다. 아침에 식구들이 남긴 식은 밥을 물 말아 김치랑 먹다가 수저를 놓고 마당으로 나갔다. 일에 쫓기기 전 남편이 정성껏 돌보던 꽃들은 무질서하게 여기저기서 봄의 새싹을 올리고 있다. 마당의 반을 차지한 철쭉 덤불은 그 뒤편으로 둥지 튼 고양이들이 묘한 소리를 내는 곳이 되었다. 오여사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마른 꽃들, 음식찌꺼기들, 깨진 화분들이 지저분하게 나뒹군다. 그 한쪽에 수선화 꽃대가 올라 봉오리들이 노랑빛을 품고 있다. 금방이라도 필 것 같다. 몇년 전 한뿌리 정도 심어 놓은 것 같은데 지금은 한 무더기다. '곧 피겠네.' 주저 앉아 은은한 향기를 맡는데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한 방울 톡 꽃봉오리에 떨어지자 갑자기 확 벌어지며 노란 수선화가 피어난다. 여기저기 옆의 봉오리들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노란빛이 넓게 펼쳐진다. 마치 소파처럼 여기 와서 누우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그 위에 가만히 누웠다. 괜찮다, 편안하다.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자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사람이 각자의 책상에 옛날 타자기를 놓고 타자를 치고 있는 방이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구식 타자기를 탁탁 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대체 뭐지? 내가 여기 어떻게 온 거지?' 잠시 오여사를 싣고 온 듯한 노란 소파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방의 사람들, 둘씩 마주보고 나란히 앉아 각자의 일에 열중해 있는 듯해서 오여사는 마음껏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타자수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고개를 홱 꺽더니 오여사와 눈을 마주치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애써 누르고 그 타자수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여사가 가까이 다가가 타자 치는 것을 들여다 보아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치 나무 인형 같은 느낌의 그 사람이 타자를 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헤겔은 자연이 거대한 정신에서 나왔다고 믿었다. 우리가 제 모습을 보려고 거울에 자신의 상을 투사하듯이, 정신도 자신을 인식하려고 자기를 밖으로 끄집어 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자연이라는 것이다. 거울을 처음 본 아기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타인으로 보듯이, 정신도 처음엔 제 앞에 선 자연을 타자로 본다. 그러다가 점차 그 낯섦을 극복하고 그게 결국 자신의 외화, 즉 자신의 다른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이 세계의 역사이자 철학의 역사다.' (*미학오디세이 중)

자세히 보니 아주 작은 모니터가 달려있긴 하다. 비슷한 타자기를 20대 초반에 써보았다. 아마 워드프로세스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한 줄이 윗줄로 넘어가고 다시 아랫줄에 타자를 치는 것이다. 타자수는 모니터를 확인하면서 치고 있지만 정작 글자들은 종이 위에 남는 게 아니었다. 완성된 줄은 윗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타자 수 머리 위 천정에 매달려 있는 기계로 빨려들어간다. 마치 고깃집 환풍기구가 숯불판 위의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 글자들이 어디로 가나요?"

여전히 타자기에 눈길을 주고 있는 타자수에게 물었다.

"당신네 인간세상이요. 우리가 이렇게 보내주면 당신들 머리 속에 지식들이 생기는 것이랍니다."
"당신들은 이런 걸 다 어떻게 아는 거죠?"
"우리 각자가 인간들의 지식창고예요. 이 방 말고도 수없이 많은 방들이 이곳에 있어요. 각각의 방에서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지식들을 풀어내는 거죠."
"그럼 여기서 타자로 친 것들은 우리 인간세상에 어떻게 전달되나요?"
"저 기계로 빨려 들어간 다음에는 저희도 몰라요. 우리 타자기 마녀 말에 의하면 간절히 원하는 사람한테로 끌려간대요."

다른 세 타자수는 아무런 반응없이 계속 타자만 쳐대고 있었다. 그들을 자세히 보니 체구가 좀 작고 앉은 자세가 편안해 보였다.

"어떻게 오셨죠? 여기는 당신네들이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요?"

타자수는 여전히 오여사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타자를 치면서 말했다.

"집마당에 있었는데, 갑자기......"
"잠시 후면 마녀가 올 거예요. 우리 타자기 나라를 다스리죠. 모든 걸 관리하고 우리를 배치해요. 나쁜 분은 아니지만 당신이 온 걸 반기지는 않을 것 같군요."

그 말을 하다가 갑자기 타자 치던 손을 멈추고 머리를 짚었다.

"아, 뭐더라......?"

그러더니 곧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뭔가를 꺼낸다. 요즘 태블릿처럼 생긴 물건이다.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사이즈의 화면에 글자가 뜬다. 글자는 한글도 영어도 아랍어도 아니었다. 오여사의 지식 범위에서 본 적이 없는 문자였다.

"아!"

타자수는 알았다는 듯이 태블릿 화면의 글자를 타자로 쳤다. 그리고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게 뭐예요?"
"갑자기 단어나 문장이 떠오르지 않으면 이 태블릿이 알려줘요.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면 화면에 글자가 떠오르죠."

침이 꼴깍 넘어간다. 머리로 그림은 그려지는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오여사에게 꼭 필요한 물건 아닌가?

"저도 한 번 해봐도 돼요?"

타자수는 선뜻 내줬다. 오여사는 얼른 머릿속으로 아까 본 노란꽃을 떠올렸다. 정말이다. 화면에는 어느새 한글로 '수선화'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곧바로 자신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쩔쩔매는 모습을 떠올렸다. 당연히 '건망증'이라는 단어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 떠오른 단어는 '슬픔'이었다.

"빨리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곧 마녀가 올 것 같아요."
"어떻게 나가죠?"
"들어온 대로 나가면 됩니다."

입구에는 노란 소파가 그대로 놓여 있다. 오여사는 얼른 소파에 가서 앉았다. 갑자기 소파가 펑, 갈 때처럼 그렇게 오여사의 집 마당으로 돌아왔다. '마녀에게 잡히지 않아서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는데 손에 태블릿이 그대로 들려 있다. 난감해하던 중에 언뜻, 돌아보지 않은 채 한쪽 손을 들고 잘 가라고 인사하는 타자수의 옆 모습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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