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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bootsbookclub Jan 13. 2021

시스터후드 /자몽

redbootsbookclub_magazine vol.1


 두 살 터울의 자매, 언니와 나는 성격부터 외모까지 정반대이다. 자매지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체형과 얼굴도 닮지 않았다. 착한말투와 얼굴에 단정한 모범생언니와 덜렁거리고 까불고 공부도 못했던 동생 나. 언니의 머리는 올백으로 하나로 묶고 거기에다가 머리띠까지 꽉 눌러써서 머리카락이 한 올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어느날 긴 생머리 에 빨간 머리띠를 하고 얄밉게 가는 언니의 머리에 꼬딱지를 파서 묻혔다. 누구나가 볼 수 있 도록 크게 ,늘 엄마에게 준비물을 놓고 왔다고 울면서 가져다 달라고 전화하는 언니가 이해가 안됐다. 선생님한테 한번 혼나면 되지 저렇게 엄마를 귀찮게 할까. 방학때 매일매일 나가 놀았던 나와는 달리 책상앞에 앉아있던 언니의 뒷모습이 생각이 난다. 나는 언니를 친구가 없 다고 놀렸다. 정말 언니친구는 내가 다 알정도로 손에 꼽혔다. 그렇다고 내가 인싸였던 것은 아니다. 또래 친구들이 아닌 동네 동생들이 우리 집앞에 모여 현경언니!라고 부르면 나는 나가서 동생들과 하루종일 산에서 풀밭에서 엄마놀이 하며 놀았다. 엄마는 동생들을 이끌고 다 니는 내가 부끄러운거라고 했다. 엄마아빠는 맞벌이라 집에 없었고 텔레비전 위에 그날 간식 값 200원이 놓여 있으면 나는 덴버껌에 과자를 사서 먹었다. 언니는 그 돈을 쓰지 말라고 아껴야한다며 나를 붙잡고 울었다. 어느날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으려는데 전화비를 아껴야한다면서 꺼이꺼이 울면서 말리는 것이다. 생라면을 비닐에 넣고 간식으로 즐겨 먹었다. 어느날 언니가 친구랑 놀고 있는 운동장에 생라면을 들고 간 적이 있었는데 언니는 창피하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나는 공부도 못했고 지저분했다 언니는 매일 나를 더럽고 공부도 못한다며 놀렸다. 그때의 나는 실제로 인지능력이 조금 부족한 듯 하다. 내복을 입고 학교를 가기도 하고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가발이라며 나가서 놀기도했다. 언니는 항상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았지만 나는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맞았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겟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때리던 선생님들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언니와 난 이렇게 늘 달랐다. 중.고등학교때는 단정한 단발머리에 자기 어깨보다 큰 마이에 무릎아래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안경을 쓴 누가봐도 모범생인 언니가 창피했다. 그때 신디더 펑키, 쎄쎄등 청소년 잡지가 유행했다. 나는 잡지에 나오는 화장품을 사서 바르고 아이라이너 바르는 연습을 했다. 헐렁한 여분의 교복을 입고 가방안에는 슬림하게 줄인 교복을 가지고 다녀서 선생님 눈을 피해 입고 다녔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춘기를 보냈고, 같은 공간에 살고 있었지만 다른 곳으로 바라보며 살았다. 달라도 너무 다른 자매였고 각자 달려가는 길의 모양도 달랐다. 재수를 하게 되어서 언니가 다녔던 재수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언니가 처음 시작 한 아르바이트가 롯데리아였는데 나도 롯데리아를 아르바이트로 시작하게 되었다. 신촌에서 자취했을 때, 언니가 아르바이트했던 크리스피크림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다. 언니가 갔던 길을 우연히 밟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잡시 겹쳤을까. 하지만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대 학을 서울로 가게 되면서 언니랑 고시원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언니는 바빠서 집에 없었다. 우리가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결국 처음 독립에 힘들었던 나는 3달만에 집으로 돌아가서 통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니는 호주로, 나는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사실 20대 때에 언니의 모습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대의 언니는 어느곳으로 질주하고 있었을까.


 일본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방황을 오래했다. 모았던 돈도 친구들과 술을 먹으며 2주만에 다 써버렸다. 늘 밤에는 술에 취해서 밤을 새고 아침에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왔다, 외롭고 두려웠다. 호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언니는 나에게 교회를 가자고 했지만 나는 싫다고 했다. 언니가 고등학교때 기독교는 피로 물든 역사라며 교회에 가지말라고 하지 않았냐며 따졌다.


너 오늘 놀려면 돈 필요하지?
교회 갈때마다 돈 줄게 했다.


5천원씩 만원씩 받으며 예배 자리에 앉아있었다. 새벽예배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 들어올 시간이 었으니까. 그런 내 옆에서 언니는 방언이 터지고 옆에서 하나님을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나는 친절한 교회 사람들이 싫고 관심이 어색해서 싫은티를 잘 냈다 .예배가 끝나고 언니에게 불 만이 터져 사람들의 욕을 해댔다. 언니는 나의 입은 폭탄같다며 제발 부탁이니 교회에서 말하 지 말라고 했고 나는 예배가 끝나고 집에 오면서 자주 욕이 터졌다. 그렇게 돈을 받기 위해 교회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언니의 옆에서 기도를 했다. 진짜 하나님이 내 옆에 있다며 만나 달라고,내 삶이 너무 고되니,이런 나를 좀 위로해달라며 기도했다. 2달 후,기도하다가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보니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진짜 있어! 하나님이 진짜 있어!! 그때부터 내 삶은 360로 바뀌 었다. 믿음이 생기고 교회를 다니면서 언니를 대하는 내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언니 친구의 추천으로 야마하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언니친구는 나와 이야기를 하더니 계속 배꼽을 잡으며 웃는 것이다. 현영이랑 말하는 거 진짜 똑같아. 자매 아니랄까봐. 그런말 많이 듣지?라고 말했대. 내가 언니가 똑같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가 자매인줄도 모를 정 도로 다른데, 똑같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언니욕을 친구들에게 곧 잘 했다. 답답하다 이기적이다. 자기만 잘난 줄 안다. 나는 언니에게 자주 화가 나 있었지만. 사실 언니의 관심이 필요 했었던 것임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언니는 바빴고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았고. 밖을 나가면 절대 외식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돈이 아까웠다고 한다. 천원을 아끼려고 도서관에 도시락을 싸가지며 취업준비를 했던 언니. 나는 지하철에서 불쌍한 사람에게 2.3천원 을 주고 왔는데 정작 진짜 가난한 사람은 집에 있었구나 웃으며 속으로 안쓰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 언니가 화가 났고 답답했고 통하는 대화가 없다고 생각해서 싫었다. 좋아서 싫었다. 툴툴대고 공격적이었던 내 표현은 애정이었고 서운함이었다. 나의 삶은 언니의 영향을 항상 받아왔던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표현하기까지 오랜시간이 지났다.

 20대에 스쳐갈 인연들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쓴 것 같아 후회가 된다. 내 시간을 아끼지 못했 고 내가 나를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었다. 다 내 인생에 남아주고 영향을 끼칠 인연들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나와 닮은 듯 다른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언니가 있는데, 왜 나는 항상 밖에 서 돌고 돌면서 찾았을까. 지금의 나는 언니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함부로 애기하지 않고 오히려 조심하기까지 한다. 우리 자매는 지금에서야 우리의 어린시절을 자주 이야기한다. 우리 는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왜 우리가 쉬지않고 달리는 자매인지, 책을 좋아하는지 등등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많다. 엄마가 일찍 이 세상을 떠났다. 옆에서 내내 우는 언니와 달리 나는 담담했다. 언니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친정이라고 생각하고 엄마라고 생각 하고 내 유일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언니가 내 옆에서 서 있기 때문이다. 언니와 나는 지금도 다르다. 최근에도 자매가 정말 다르네요 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은 정말 언니와 닮았네요 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언니는 또 다른 나다. 삶의 모양은 다르고 각자 추구하며 나아가는 가치관도 모습도 말투도 모두 다 다르지만, 언니의 아픔과 기쁨은 곧 나의 아픔과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데칼코마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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