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의 힐링다이어리
조지 오웰은 어느 날, 자신이 가진 책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고, 담배에 쓰는 돈과 비교했다. 책 구입에 쓰는 돈이 더 적었다. 독서는 적은 돈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담배는 피워본 적이 없고, 매일 캔맥주를 사 마시거나, 한 달에 한두 번 술자리를 갖는 경우가 있어서 책과 술값을 비교해보았다.
한 달에 책을 5권 정도 구입하는 것 같다. 15000원짜리 책 다섯 권이면 75000원이다. 좀 더 생각해보니, 책 값으로 10만 원은 쓰는 것 같다. 미술사 관련 책도 종종 구입하는데 대체적으로 가격이 3만 원에서 8만 원까지도 했던 것 같다. 캔맥주를 하루에 딱 한 캔 정도 마시는데, 2300원 정도라고 가정하고, 한 달에 15번 정도 마시면 35000원? 막걸리 회식 두 번이면 4만 원 정도라고 했을 때, 75000원이다. 책을 조금 더 많이 사는 것 같다. 내 경우엔, 맥주보다는 책값이 더 들고 있다.
조지 오웰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이 될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아주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타인의 책을 서평도 많이 썼는데, 당연히 출판사에서 추천사를 부탁해서 쓴 것일 테니, 칭찬하고 싶지 않아도 칭찬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많은 책을 만나다 보면,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조지 오웰은 스스로의 글도 그렇게 엄격하게 보게 되었다. 자신의 글이 잘 쓰인 글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는 계속 써나갔을 것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내 글도 독특한 문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것이 글을 잘 쓴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문체가 생겼다는 것은 글을 계속 썼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겨난 것이다. 전업작가도 아니고, 그냥 책모임 진행자인 나는, 글 쓸 일이 별로 없다. 나는 그저 지난 4년 반 동안 일기를 썼을 뿐이다.
일기는 다양한 장르로 변신이 가능하다. 어린 시절 방학숙제로 매일 일기 쓰기가 있었는데, 그때 깨달았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도 되고, 놀러 갔다 왔으면 여행문, 사건이 생긴 날은 설명문, 동생이랑 싸운 날은 속상함을 털어놓는 감정 쓰레기통, 외식으로 맛있는 걸 먹은 날은 맛집 후기 같은 장르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성격상 어제와 비슷한 일기를 쓴다는 것은 용납이 안되었는지 나는 참 골고루 글감을 쥐어짜 일기장을 채웠다. 성인이 되어 다시 블로그 일기를 쓰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차이가 생겼다면 일기에 사진과 동영상이 종종 곁들여졌다는 점이다. 일기는 생생한 일상 저장고가 되었다. 글 쓰는 솜씨가 부족하지만, 개의치 않고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왜 쓰는 가?'에 대한 답변이 남아 있다. 오래전부터 그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일상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일이 종종 발생하면 나는 일기로 그것을 풀어냈다. 행복할 수 없는 상황들이 글이 되면 신기하게도 다르게 보인다. 미처 그 시점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들, 아이디어들, 반성할 점이 떠올라 쓰게 되기도 하고,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글로 가라앉히기도 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사람을 상대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글로 변환되면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내 글은 우울감과 피로감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강박, 집착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그건 마치 기도하고 명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글은 소음이 없다. 그저 조용히 내 곁에 자리 잡고 한 곳에 머무르는 데이터가 되어준다.
누군가, 다양한 일을 시도하는 정신없어 보이는 내가 어떻게 그 일들을 다 해내냐고 물었다.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타인에게 짜증내기보다는 나 스스로 글로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편이었다. 타인에게 짜증 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관계만 파탄 나고 남는 건 상처뿐이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소통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끊임없이 전쟁하고 경쟁하고 사기 치고 거짓말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소통은 환상이고,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잠깐 옆길로 샜지만, 오히려 나는 소통보다는 내려놓고, 글로 쓰레기 같은 감정들을 다스리고 있었나 보다.
최근, 융의 심리학에 대해 빨강장화 북클럽 멤버들과 책 읽기를 하고 있다. 놀랍게도 내 안에 여러 다양한 역할을 하는 심리적 요소들이 있다고 한다. 놀라운 이유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별일 아닌 것에 행복해하는 나, 별것 아닌 일에 피곤해하는 나, 관련 없는 사안에 감동하거나, 중요한 연관이 있지만 무심한, 화가 날 법도 한데, 그냥 허허 웃고 넘기기도 하고, 욕할 것 까지는 없는데 길길이 뛰며 혼자 욕을 하면서 화를 내고, 그러다가도 토닥이면서 글로 남기고 기도하듯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모든 내가 일기장에 다 녹아있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글을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라기보다는, 나 스스로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기록한다는 차원에서 글을 쓰고 있다. 결국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이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인내하는 과정에서 나는 삶을 이어나갈 이유를 찾는 것이다. 타인에게 기대고 싶어서 가끔 시도하지만 대부분 실망하고, 환상이 깨지고, 결국은 나에게 돌아온다. 그나마 평범하면서 착하고 가끔 재미난 농담을 해주는 옆지기가 있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종종 인간관계는 부모 자식, 형제, 그리고 배우자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외는 다 주고받는 관계일 뿐이다. 정을 주지 않으면 곧 멀어지고, 싫증 나면 언제든지 떠나도 되는 의무가 없는 관계.
하지만, 힐링다이어리_ 일기 모임을 1년 넘게 지속해 오면서, 언제든지 떠나도 되지만 떠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글쓰기 공동체라니, 다들 부러워하겠지만, 이 연대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커리큘럼이 주어지는 글쓰기 수업이 아닌, 인생을 나누고 서로 옆을 지켜주는 글쓰기 공동체. 그렇게 되게 만들려고 무던히 애를 써주었다. 나도 멤버들도. 그것은 돈으로 계산하거나 노동으로 메꿀 수 없는 영적인 교류 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년간의 일기 쓰기와 지난 1년의 일기 모임에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쏟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이었을까.
올리버 색스는 죽을 때까지 글을 썼다. 손으로 일기를 쓰고, 1000권의 노트를 남겼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이 땅에 존재했다는 증거로 내 글을 남겨보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별 의미는 없겠지만, 내가 존재했다는 증거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글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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