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의 힐링다이어리
2021년 11월15일 길 위의 인문학 출판기념회. 책 제목은 <함께 만드는 내비게이션>. 내 이름(김혜현)이 들어간 첫 번째 책이 나왔다. 출판기념회 날, 책표지를 처음 본건데, 앞 표지에 내 이름이 엉뚱하게 (김혜연) 쓰여 있었다. 너무 자주 겪는 일이라, 웃음이 빵 터졌다. 표지 디자인 한 번만 미리 봤다면 잡을 수 있는 오탈자였는데, 예견된 것처럼 되풀이되던 웃긴 장면 중 하나다. 이 날, 도서관장님은 출판기념회 소감을 이야기하시면서 또 내 이름을 다르게(김혜련) 부르신다. 괜찮다. 자주 겪던 일이다. 또 '풉'하고 웃었다.
내 이름은 우리 엄마가 한자 옥편을 보고 '마음 가는 대로' 지으셨다. 내가 우리 집 장녀가 아니라 장남이었다면 아마도 할아버지나 아빠가 작명소 가서 이름을 지어온다든가,신중하게 지었을 텐데, 딸이라서 그냥 다들 무심했을까? 세 살 때까지 내 이름은 '건미'였는데, 건축일을 하시던 아빠가 별명처럼 부르셨던것 같다. 네 살이 되어서야 출생신고를 한 것 같은데, 엄마가 다시 '혜현'이라고 지은 걸로 알고 있다. 늘 친척들은 나를 '근미'라고 불렀다. (주변에 죄다 갱상도 사람들. . . . ) 나는 어릴 때 내 이름이 '금미'인 줄 알았다. (발음상 금미로 들린다) 여하튼, 금은 반짝반짝 빛나고 좋은 거니까, 스스로를 귀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남자 형제는 물론 남자 사촌들도 거의 없어서 차별받을 일 없이 자랐다. 커가면서 새롭게 주어진 "혜현"이라는 이름을 내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한자로 이름을 쓰면서 혜현이라는 이름이 "슬기롭고 어질다"라는 뜻인줄 알게 되었다.
'혜현'은 히읗이 연속으로 두 개라, 발음하기가 어렵다. 내 이름을 한 번에 못 외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남편은 나를 '김씨부인'이라고 불렀고, 9년 전에 '칸쵸'라는 별명이 생기면서, 나는 본명보다 별명으로 더 잘 기억되고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 이름이야 어찌 됐든, 내가 쓴 글이 처음으로 책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져서 너무 기뻤다. 물론 좀 더 노력했다면 좋았겠지만, 정신없이 분주한 상황에서 쓴 글들이 책이 되어서 나 스스로를 칭찬 했다. 그 정도면 괜찮다. 아이들 키우면서, 일하면서, 정당활동하면서 해낸 것 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종종 잘못 불리는 이름이지만 이름에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27살 교환연구원 시절, 종종 재미난 농담을 하던 대만인 교수님은 내게 "한국사람들도 한자 이름이 있냐?" 고 물었다. 내 이름을 한자로 써주자, 내게 "농담하는 거지? " 라며 놀라워했다. "너랑 나랑 한자 이름이 같은데? 이게 말이 돼?" 우리 둘의 이름에 쓰인 한자들은 대만에서도 보통 여자들 이름에는 쓰지 않는다고, 성인들에게 쓰는 이름이라고 말했다.(자기는 남자니까 당연하고, 나는 여자라서 안된다는 건가?) 내 한자 이름은 우리 엄마가 한자 옥편을 보고 그냥 지은 것인데, 은근 괜찮은 이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그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곳에서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그 순간도 오래전부터 예정되었다는 걸 느꼈다. 엄마가 나를 위해 용기 있게 새로운 이름을 지은 것은 정말 소중한 일이었다. 나를 혜현이라고 가장 많이 불러준 사람은 우리 엄마일 테니까. 그 당시 교환연구원 시절에 나는 그냥 죽어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존재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살면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나를 붙잡아 준 건 바로 내 이름이었다.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 세상에 사는 누구나 귀한 존재고, 나 역시 그런 귀한 사람이라는 걸.
이름을 더 아끼고 사랑해주어야 한다. 내 이름이 이름값을 하도록 나의 삶을 더 정비해서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싶다. 슬기롭고 어진 옛 현인들 처럼, 삶의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야겠다.
/ 위의 사진에서 나는 오른쪽 끝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늘 나를 본다. 사람들을 통해 나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