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dbootsbookclub Nov 13. 2021

나의 비거니즘과 페미니즘 집밥 노동기

백번의 힐링다이어리

달리다 보면 주변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진짜 달리기라면 몰입된 상태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일상생활의 속도를 비유하는 말이라면,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야 할 타이밍이기도 하다. 일기는 하루 일과 중, 잠시 멈춘 순간을 기록하는 좋은 도구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동물권이나 기후위기를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비건으로 사는 게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육식은 탄소배출에서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가끔 나의 페미니즘과 부딪히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매 일, 매 끼니마다...

여인들과 달리는 시간 비건 떡볶이와 맥주 한 캔.

외식하러 갔을 때 고기 빼고 두부 덮밥.

가지 요리는 종종 비건인의 최애 메뉴가 되곤 한다.

진짜 좋아하는 술안주?

야채 된장국. 영혼의 수프다. 직접 담근 된장도 한몫했다.

비건 초콜릿. 버섯맛이 나면, 당황스럽다. 난 그냥 버섯요리가 좋을 뿐. 버섯향 나는 초콜릿은 다시는 안 먹고 싶다.

버섯, 고추 매운 볶음. 김치볶음밥과 두부구이.

급하게 도시락을 싸다 보면 이렇다. 컬러 조합 대 실패.

햄을 굳이 안 넣어도 샌드위치는 맛있지만, 가끔 이런 걸 만나도 반갑다. 아쉬운 건 비건 햄 들어가서 안 데워줌.


한식은 비건으로 먹기 나쁘지 않다. 김치가 있기 때문.

아쉽게도 비건 김치는 아니지만.



엄마인 나는 아이들의 밥을 챙긴다. 물론 남편도 아이들의 밥을 챙긴다. 웬만하면 비건식을 하는 나는 아마도 비건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플렉시테리언? 그래도 나는 비건이라고 불리는 게 좋다. 그래야 좀 더 많이 비건으로 먹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애매한 비건식을 하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가끔 고기반찬이 나와도 엄마 앞에서 맛있게, 즐겁게, 신나게 먹지를 못한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엄마가 왜 고기를 거의 안 먹는지 알기 때문일 거다. 딱한 아이들아, 괜찮다. 먹어봤자(재정적인 형편상)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그냥 맘 편히 먹으렴.


나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엄마가 되고 싶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육아라는 속박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아이들도 그걸 안다. 엄마라는 역할을 부담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자신의 엄마라는 걸. 하지만, 나는 엄마이고, 나의 선택에 의해 나온 결과인(?) 아이들을 향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힘들어도 밥은 챙겨 먹여야 한다. 그건 정말 최소한의 의무다. 그러니, 늘 부딪힌다. 자유로운 엄마가 되기 위해 아이들을 먹일 때 비건 요리를 자주 해야 하고, 더 간단하게 요리해야만 나의 요리 취향도 만족하고 나만의 시간도 확보할 수 있으니까.


늘 이런 페미니즘과 모성애는 부딪히고, 거기에다 비거니즘은 삼각구도까지 만들어 낸다. 비건 지향으로 키울 것인지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도대체 나는 어떤 엄마로, 여자로, 비건인으로 살아야 할까? 그 세 캐릭터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는 날이 오긴 오려나?


밤마다 맥주와 비건 안주로 지친 심신을 달랜다. 아침이면틈틈이 아이들과 내 도시락을 비건식이나, 계란정도 넣어 싸고, 가족들 눈치를 보면서 두부 된장국을 끓이거나, 은근슬쩍 나물반찬을 주문해서 비빔밥을 시도한다. 가족들은 그런 내 속마음을 알면서 그냥 모른 척 식사를 한다. 식사 시간이 끝나자마자 뭔가 더 먹을 게 없는지 묻기도 하고 슬쩍 야식 먹는다며 치킨을 시킨다. 애써서 식사를 고민한 의미는 사라지고, 다시 우울해져 마음이 작아진 엄마가 된다. 내게 대놓고 고기 내놓으라고 안 하는 가족들에게도 미안하고, 가족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엄마인 내가 불쌍하다.


살아 있는 존재들을 다 만족시키면서 살아간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모두가 비건으로 산다면 기존의 축산업과 외식 식당들은 죄다 망할 텐데.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아마 대부분의 비채 식인들은 그런 두려움이 있어서 비건이 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 불가피한 선택의 문제였을까? 인간은 인간만의 편이어야 한다는?

오늘도 고민만 떠안고 다시 밤을 맞이한다. 오랜만에 친정집에 온 큰딸의 밥그릇에 삼겹살을 슬쩍 올려주는 엄마를 모른척하고, 맛있게 돼지 살을 씹어 먹었다. 급체해서 얼굴이 반쪽이 된 딸이 손주 삼 형제를 데리고 5시간 운전해서 왔는데 얼마나 걱정이 되셨을까? 고기 안 먹는 거 알면서도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슬쩍 밥그릇에 놓아두신 거다. 제발 몇 점이라도 입에 넣기를 바라면서. 엄마도 딸의 신념을 존중하는 것과 엄마로서의 역할 중에서 고민하셨을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들을 신경 쓰느라 우리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쓴다. 그저 쓸데없이 남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일까? 내가 돼지와 닭, 소들의 권리를 걱정하는 것만큼, 아이들도 애정 하고, 부모님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것은 내가 신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나만의 방법일 것이다.


개인적 발견이 중요하다고 어제 한 워크숍에서 들었다. 나는 매번 일기를 쓸 때마다, "개인적 발견"을 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발견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가 꿈꾸는 세상에 도달하는 하나의 밑거름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의 마지막 날 쓰는 일기_죽음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