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과 달리기?
글쓰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행위일까? 아니지, 초등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나? 글쓰기에는 글감이 필요하다. 일기를 쓸 때 글감을 써 넣는 형식적인 행위가 사실은 가장 필수적인 행위이다. 내가 아는 초등생 2명은, 지난 몇 년간 숙제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일기 글감을 찾는 것이었다. 글감을 고민하는 모습이 어찌나 고통스럽고 지루해 보이던지, 오죽하면 엄마인 내가 함께 일기를 쓰려고 마음을 먹었겠나.
그렇게 나는 고통분담 차원에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사실, 대단한 책을 낼 만큼 전문적인 글은 한번도 써보지 않았다. 전문적인 글쓰기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나의 필력은 형편없는 수준을 겨우 벗어난 정도이다. 하지만, 3년간 고민했던 시간이 그냥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바로 글감 고르기!
아침먹고, 점심먹고, 저녁먹고, 씻고 잠이 든, 평범하다 못해 지루해 빠진 어느 하루. 그런 날이라도 일기 쓰려고 자리를 잡으면 온갖 글감들이 머리속을 빙빙 돌아다닌다. 방바닥에서 주은 머리카락 한 올 가지고도 2000자는 쓸 자신이 생겼다. 흔한 된장찌개 하나로도 10000자는 자신있게 쓸 것 같다.( 실제로 써본 건 아니지만, 내가 아는 된장찌개 종류만 해도 10가지가 넘고, 그걸로 1000자씩만 써도 10000자는 될 것 같아서. 두부, 바지락, 꽃게, 청국장, 차돌박이, 순두부, 버섯, 강된장, 냉이, 달래 된장찌개. 좀 억지스럽군. ) 양으로 채우는 것이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좀 부끄럽긴 하지만, 장점을 잘 살려서 좋은 글을 쓰려고 많이 노력했다.
주로 내가 많이 썼던 글감은 어떤것일까? 책, 정치활동, 환경, 대안교육, 건강, 부부(남녀관계), 육아, 달리기, 영화, 책모임, 마을활동, 예술, 사회이슈, 독서습관, 공동체. 그래도 꽤 다양한 장르의 글감들을 가지고 써본 것 같다. 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감은, 책읽기와 예술분야다. 그 이유는 이 두가지로 쓸 때, 가장 신이 나는데, 자세히 경험하고 느낀 것을 묘사할 수 있어서다. 좋아하는 것들은 경험치가 다르고 관련된 감정도 더 풍부하기 마련이다. 된장찌개를 좋아하면 종류도 10가지 이상으로 다양하게 먹기 마련이고, 라면을 좋아하면 세상의 모든 라면은 다 먹어본 것처럼 떠들어 댈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도 경험도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책만 찾아 자료 정리한 보고서일 뿐, 진정한 내 글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런 다양한 글감이 있다면 이제 앉아서 쓰면 된다. 최신형 노트북이라든가 예쁜일기장 보다는 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블로그 포스팅하며 작성하곤 했다. 하루 일과가 잘 떠오르지 않는 날에는 틈틈이 찍어 둔 그날의 사진들을 먼저 올리고 그 사진을 따라 하루경로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일기쓰기로 나의 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미처 그 순간에 인지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불쑥 올라온다. 그 감정들은 기록해 달라고 나를 졸라댄다. 어린 동생이 언니에게 칭얼거리듯 그렇게 보듬어 달라고 조르고, 기쁜 일은 축하해 달라고 말한다. 매달리는 감정들을 그렇게 글로 표현하고 나면, 섭섭했던 것들은 어느새 글로 내려앉아 얼굴을 바꾸고 낭창하게 머물러 있다. 더 이상 나의 마음속에서 요동치지도 않고 덤덤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새침해진 나만 남아있다. 글을 잘 썼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을 잘 써먹었다는 의미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하루일과를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잠깐 숨돌리면서 생각할 여유도 없다. 그렇게 되면, 저녁이 되어도 글이 쉽게 써지지가 않는다. 직업상 책모임 운영자 이지만, 나의 글은 책 읽고 떠오르는 느낌을 나열하는 것보다, 하루동안 경험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시작될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사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으면 문장으로 잘 떠오르지 않기에 글을 쓰기전에 정리하는 시간이 약간 필요하다. 이 때, 제일 좋은 것은 걷고, 달리는 것이다.
운동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걷는 일을 주로 했었다. 걸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을 했다. 오늘 해왔던 일도, 오늘 혹은 내일 해야 하는 일도 말이다. 몸은 움직이지만, 특별히 머리를 써야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날 경험했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중요한, 혹은 소소한 일들을 더 생각하게 된다. 걸으면서 하는 사고과정을 통해 정리된 것들은, 글을 쓰기 시작하면 굉장히 자연스럽게 구성이 잡히고, 문장도 더 자세하고 정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운동이 더 필요해서 달리기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1분도 뛰지를 못하다가 몇 달을 꾸준히 하니 1시간씩 달리기도 할 수 있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작한 달리기는 새로운 기능을 나에게 선물했다. 그건 바로 '머리 비우기,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창의적인 생각하기'이다. 달리기는 은근히 딴 생각을 하기가 좋다. 주로 달릴 때 음악을 듣지 않고 달리기 때문에 지루한 느낌이 드는데 이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된다. 그 생각들은 달리는 동안 정리가 되고 어느정도 결론이 나기도 한다. 그렇게 결론이 난 것들을 일기로 쓰면 늘 자연스럽게 기록으로 남게 된다. 달리기가 나에게는 글감도 되었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독학으로 글쓰기를 하다보니, 글쓰기에 필요한 것이 겨우, 글감과 달리기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좀 우습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러니 한번 나처럼 해보면 좋겠다. (달리기 신발은 런닝화면 된다. 마라톤화까지는 필요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