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하루

고대 여성수학자 히파티아를 애도하며

by redbootsbookclub


아침에 늦잠을 잤다. 늑장을 부렸다. 몸이 안 좋았지만, 어제 너무 힘들게 일을 한 탓에 두통이 심했고, 진통제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티면서도 책을 붙들고 읽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전화를 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1시였지만 괜한 보상심리 때문에 맥주를 한 캔 따서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큐레이터에 관한 책이었다. 그렇게 쉴 때도 나는 책을 손에 들고 있다. 그러니 늦잠을 잘 수밖에 없다.

몸이 아프면 하루 쉬면 되는데,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아프다고 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챙겨주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 엄마라고 하자. 엄마니까 아플 수도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아파도 쉬지 않았던 습관이 몸에 배서 몸이 안 좋아도 아이들을 돌보고, 밥을 짓고, 일도 한다.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라서 병가를 내지도 않는다. 다행히 지난 몇 년 간 입원할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감사한 일이다.










아이들을 먹이고, 학교와 유치원에 데려 다 주고, 오늘 가야할 곳으로 향한다. 어제는 몸이 아플 정도로 무리해서 모임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병이 난 상태로 진통제를 삼키고, 자료를 챙겨서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들어가기 전에 한번 더 자료를 살펴본다. 빠진 것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핀다. 모임 장소에 도착해서는, 열 체크를 하고, 강사 출석부에 서명을 한다. 그리고 운영자님과 반갑게 인사를 한다. 도착하는 수강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료에 대해 설명도 해드린다. 오늘 함께 한 모임은 고흐에 관한 두 권의 책에서 텍스트를 발췌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낭독모임이다. 함께 읽으면서 책을 읽는 경험을 느껴보는 것이다. 미리 읽어오지 않아도 되니 부담 없이 올 수 있다. 그 만큼 모임을 준비하는 강사인 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준비를 한다.



직접 텍스트를 타이핑하고, 편집하고, 자료를 첨부한다. 매주 모이는 모임이라 그만큼 시간을 많이 쓰게 된다. 2시간 낭독모임을 하기 위해 기본 5-6시간은 시간을 써야 한다. 8회과정 중에서 4회는 예술가, 4회는 여성 작가들에 관한 자료를 함께 읽기로 했다. 오늘은 3회차, 코로나로 인해 두 번 연기가 된 터라 조금은 쉰 느낌이지만 그만큼 들어오는 강사비는 지연이 되니 재정적인 것도 아쉽다. 코로나는 나에게 생각할 시간은 많이 주었지만 그만큼 일할 시간이 줄어들고, 언택트 상황에 맞게 일의 변화도 주어야 해서 잡다한 업무는 늘었지만 수입은 줄어들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망할 코로나’ 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나는 철학과 문학을 통해 배운 것이 있으니까. 코로나바이러스는 아무 죄가 없다.


낭독모임이 끝나고, 곧바로 내가 운영하는 빨강장화 공간으로 돌아오니 글쓰기 팀이 수업을 하고 있다.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한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심규섭님의 <궁중회화>, 조선시대 책가도에 관한 자료를 읽고 있다. 책과 자료를 챙겨들고 조용히 나와서 근처 카페로 갔다. 동네 카페가 여러 개 인데, 다 아는 이웃들이다. 서로를 잘 아니 참 편하고 좋다. 옆 카페는 오늘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거려서 그 옆 카페로 갔다. 따뜻한 자몽차를 시켜서 먹고,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는다.


정조대왕이 김홍도에게 책가도를 그리게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읽었다. 정조대왕이 민심을 얻기 위해 했던 행동에 관한 것들도 있다. 그림으로 민심을 얻었다는 대목에서 정조대왕의 센스를 느낄 수 있었다. 책가도를 그리게 한 것은 선비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대왕실록이 있다면 따로 챙겨 읽어야지. 다음 책 리스트가 추가된다.


글쓰기 수업이 끝날 시간에 맞춰서, 들어갔다. 책을 내시려고 준비하시는 옥진선생님과 글쓰기반 선생님 정단선생님이 앉아계신다.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주문을 하고는 밥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두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연출산 조산사로 38년을 일하신 옥진선생님은 글도 이미 많이 써 오셨다. 책을 내는 것은 큰 문제가 안되는 듯하다. 응원을 해드렸다. 이 곳에 오는 분들은 모두 여성분들이고, 그들은 재능이 뛰어나고 각자의 자리에서 커리어를 많이 쌓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커리어가 특별히 없더라도 책,영화,미술전시를 좋아하는 분들이다. 문화트렌드를 형성하고, 소비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분들에게 내가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최종적인 일이 바로 응원과 지지이다.


배달시킨 밥이 와서 맛있게 먹고, 정리를 하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러 간다. 데리러 가는 김에 학교 근처 두레생협에 들러 장을 본다. 장 본 것도 차에 싣고, 아이도 차에 싣고 집으로 온다. 집에 와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막내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들이 유치원 마당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신나게 논다. 나도 거기 주저 앉아 다른 엄마들과 함께 땅콩도 까먹고, 이야기도 하면서 한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온다.


몸이 천근 만근이다. 진통제를 더 먹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저녁에 지역에서 하는 책모임이 하나 더 있었다. 내가 간식을 챙겨 가기로 약속한 것이 생각난다. 얼른 일어나서 아까 장 봐온 것 중에 과일을 몇 개 담고, 가는 길에 꼬마김밥을 3팩 샀다. 내가 운영하는 모임공간에서 하는 모임이라 문을 열어드리고, 간식을 셋팅 했다. 한달에 한번 모이는 모임이고, 지역 녹색당에서 비용을 후원하는 모임이어서 남자분들도 오신다. 어떤 분이 막걸리도 사 오셨다. 몇 달 전에 과천 별주막에서 먹었던 그 막걸리인데! 아쉽지만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사양하고 오늘 모임은 쉬기로 했다. 다행히 발제를 다른 분들이 해오시는 날이어서 모임은 잘 진행될 것이다. 내가 없어도 되는 모임이라 다행이다. 오늘은 정말 쉬어야 한다.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와있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 물어본다. 나온 김밥을 한 팩 꺼내서 먹으라고 주고, 아이들과 나는 짜장라면을 끓여서 먹기로 했다. 남편은 저녁에 나가야 하는 일정이 있어 나가고 아이들과 나는 맛있게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온다. y선생님이다. 지인분이 석사논문을 써야 하는데 문장력이 부족하시다고 글을 조금 다듬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내가 뭐 대단한 문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이번 학기는 내가 너무 바쁘니 거절해야만 할 것 같았다. 쉴 시간도 없는데 더 이상은 안된다. 다음 학기에도 논문이 잘 진행되지 않으시면 그때는 꼭 도움 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진심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재능과 실력이 있지만 학력이 남성에 비해 높지 않아서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는 경우가 많다. 이분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했다. 이런 분들은 정말 다 돕고 싶다. 특히 논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통화를 하다 보니 아이들이 내 짜장라면까지 다 먹어 치웠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김치볶음밥을 해서 맥주 한 캔과 함께 먹었다. 아이들이 숙제를 시작하는 것을 본다. 아이들이 모두 책을 읽고, 숙제를 한다. 이렇게 곁에서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만약 내가 일반 기업을 다니는 회사원이었다면, 야근이 있는 날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엄마를 도와 육아를 할 누구도 없다면 엄마는 오롯이 혼자서 육아를 감당해야한다. 나는 그 일을 12년을 했다. 물론 남편도 함께 했지만 그도 나와 마찬가지다. 혼자서 감당하듯 아이들을 돌보았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 그러면서도 보람된 일을 찾았다. 그 일은 지역에서 여성들과 함께 책을 읽고 그들의 커리어를 응원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지난 3년간 해 왔다. 비록 눈에 띄는 성과는 별로 없다. 아직은.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별 성과도 도움도 없다면 그때 이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 그러니 아직 7년이 남았다. 해 볼만 하다.


고대 여성수학자 히파티아가 생각났다. 그녀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했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힘들지만 일상을,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두통이 있다. 옛날에는 그냥 드러누웠겠지만 지금은 아파도 할 일은 하고 눕는다. 내가 변화했으니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다. 그 희망을 기록하려고 이렇게 매일 쓴다.


#히파티아#책모임#여성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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