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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꾸꾸 Feb 12. 2023

파리까지 14시간 (1)

비행기 시간 순삭하는 방법


'14시간...?'


유럽이 이렇게나 먼 곳이었는지 비로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제껏 나의 여행은 편도로 4시간 이내로 걸리는 아시아권 국가가 대부분이었고, 가장 오래 비행기를 탔던 것은 호주 9시간이었는데 14시간이라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실 시간보다 고립된 공간에 오랜 시간 있는다는 사실은 그만큼 방해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여행에서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을 기대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수직낙하를 경험하고 난 후로는 비행기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비행은 딱 두 번 있었는데, 대학생 때 가족끼리 떠난 제주도여행에서의 귀경길과 불과 파리에 가기 1주일 전 발리여행에서의 귀국길이다.


| 비행기가 무서워졌던 순간


2019년 제주도여행 당시에 불어닥친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하고 인천 상공을 1시간가량 선회했던 적이 있다. 내내 수직낙하 롤러코스터를 탄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끔찍하다. 밤 12시가 거의 가까운 시각이라 평온하게 곯아떨어진 우리 엄마 아빠를 보며 부럽기도 하면서 오히려 다행이던 웃픈 기억이 난다.


심지어 그때 공항에 내려서는 택시를 타고 집까지 왔는데, 쏟아지는 폭풍우 시속 120km로 달리는 택시 아저씨의 운전은 더 소름 돋게 무서웠고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피곤한데 차라리 집에 빨리 도착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지.


폭풍우, 야밤 그리고 뚫린 고속도로는 택시 아저씨에게 신나게 레이싱기어를 올릴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아마 태풍 난기류에서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보다 태풍 빗길 속 과속운전으로 사고 날 확률이 수 백배는 높았을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아찔하다.


그리고 두 번째 기억은 바로 가장 최근에 떠났던 발리여행에서였다. 발리여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8시간의 비행은 밤비행기였고, 비행기는 이륙 30분 만의 수직낙하로 시작해 수시로 울리는 안전벨트 경보음과 기장님의 긴급기내방송으로 단 한숨도 잠에 들 틈을 주지 않았다. 기내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깔끔하게 먹어치우는 내가 아침의 크루아상과 버터를 절반만 먹고 남겼다면 말 다한 거다.


가장 최근의 여행이 이렇다 보니 14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꼼짝없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난기류의 악몽을 재현할 생각을 하니 떠나기 전부터 끔찍했다. 미국에서 유학한 언니에게 길게 비행기를 타면 어떤 느낌이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미치지. 그래서 난 그냥 자."


심지어 난기류가 무섭다고 얘기하면 언니는 항상 대학생 때 샌디에이고에서 테네시로 가는 비행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날 더 무섭게 만들곤 했다.


"그때 비행기 좌석이 한 줄짜리 초소형 비행기였는데 가는 내내 롤러코스터였거든? 나도 무서운데 옆에서 케이시(언니의 미국 친구 이름)는 Annie, I'm scared 이러지, 외국인들은 Oh, God please 이러지. 비행기 착륙하자마자 사람들이 기립박수에 환호성 질렀다.(사악한 미소)"


'절레절레, 도움이 안 돼.'


그래서 나는 스스로 14시간의 비행을 순삭할 방법을 모색했다.




| 비행기에서 시간을 순삭하는 방법


시간을 빠르게 보내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크게 두 가지가 있겠다. 잠을 자거나 어떤 일에 열중하거나.


일단 첫 번째 방법, 잠자는 것. 우리 비행기는 아침 10시 45분 비행기였으므로 분명 비행기에서 잠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방법은 비행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중할 수 있을 만한 일들을 14시간을 채울 만큼 많이 들고 가는 것이었다.


대낮의 비행기에서의 14시간을 순삭할 비장의 카드들을 선정하기 위해서 일단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비행기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에게 하루라는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만족스럽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상쾌하게 잠에 들 수 있는 날에 나는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계획을 세우고 짐을 싸면서 명심했던 것은 욕심 버리기였다. 혹시 모르니 이것도 저것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재밌는 것 몇 개만 가져가자라는 것이었다. 비행기에서 할 일을 생각하고 짐을 싸는데 뭘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종의 나라는 로봇에 패치된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이것저것 새롭게 배우고 시도하기 좋아하는 나에게는 영상 편집, 그림 그리기부터 춤추기나 악기 배우기까지 온갖 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나 조금씩 손을 대고 오래가지 못한 일명 '간헐적 취미'들이 상당히 많다. 때에 따라 예전에 했던 간헐적 취미가 살포시 고개를 들어 오랜만에 기타를 집어 들거나 먼지 쌓인 플루트를 꺼낼 때도 있는데, 문제는 어떤 취미든 할 때마다 다 잘하고 싶은 욕심에 부담감만 느끼고 결국 어느 하나에 집중해지 못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었다.


불과 몇 주 전의 발리 여행에서만 해도 짬을 내 운동을 하기 위한 고무 밴드와 마사지볼, 책 3권에 영상 편집을 위한 노트북과 전자책을 읽기 위한 아이패드까지 챙겨 쓸데없이 가방만 무거워지고 정작 여행 가서는 현지를 즐기기에도 바빴던 나를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한 번에, 하나만 하자.'


그래서 이번에는 책 한 권과 드라마 한 개 그리고 유럽여행에 도움이 될 전자책과 영상 몇 가지를 다운받아

아이패드 하나에 몰아넣고 가벼운 짐을 챙겼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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