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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꾸꾸 Feb 12. 2023

파리까지 14시간 (2)

프랑스 가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보다 자리가 넓은걸?'

이 정도면 나에게 비즈니스석이다. 물론 비즈니스석을 타본 건 아니지만 말이다.


14시간의 비행은 처음인 터라 타기 전부터 지난 발리 여행의 지옥같았던 귀국길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통계적으로 안전한 걸 알지만, 비행기 타는 것이 더 무서운 이유는 비행기는 자동차에 비하면 철저히 나의 통제력을 벗어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났을 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웅크리고 머리를 잡는 일밖에는 없는 것 뿐만 아니라, 밥도 움직임도 휴식도 내가 있는 공간을 밝히고 어둡게 하는 일조차도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피곤한 건지 오른쪽 쌍커풀이 자꾸만 겹쳐지는 느낌이 났지만 졸린 건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있기를 바라는 여행객들을 위해 기내의 불은 일제히 꺼졌지만, 14시간이나 남은 비행시간의 첫 시작부터 잠이라는 히든카드를 써버릴 수 없었다. 책도 읽고 드라마도 보다가 핸드폰 메모장이나 사진첩까지 뒤적거리며 정리를 아무리 해도 시간이 가지 않을 때 비로소 잠이라는 히든카드를 꺼내들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둘 눈을 붙이는 사람들 가운데 나는 시간을 순식간에 흘려보내기 위해 준비해 온 나만의 놀이들을 끄집어 내어 작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 비행기에서 보내는 하루의 시작


여행 전날 코엑스 영풍문고에서 급하게 산 책 ⟪여행의 이유⟫. 표지부터 예뻐서 펼쳐보고 싶어지는 책.


비행기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읽기였다. 책을 읽다가 드라마 보는 것은 쉬워도 드라마를 보다가 책읽기로 돌아오는 건 어렵기 때문에 우선 책읽기 카드부터 꺼내들었다. 비행기야말로 책을 읽기에 최적의 공간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들의 선택권이 제한된 공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해봐야 먹고 자고, 화장실 앞에서 체조하고, 다운받아 온 드라마를 보는 것 정도를 제외하고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 땅 위에서 책을 읽을 때는 조금만 지루해져도 금방 책상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부엌에 가 냉장고를 뒤지는 등 다른 행동을 하며 결국 책을 덮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비행기에서라면 책을 덮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지루함의 문턱을 넘고 몰입 상태로 들어가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지는 것이 아닐까?



심리학자 배리슈워츠의 책 ⟪선택의 심리학⟫에 '선택의 역설'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사람들은 선택지가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선택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라는 개념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선택의 자율성도 커진다는 면에서 한편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포기하는 선택지도 많아지기 때문에 선택자는 선택을 주저하게 되고 선택에 대한 만족도도 떨어지기 쉽다. 넷플릭스 증후군이나 인스타의 릴스, 유튜브의 숏츠와 같은 숏폼컨텐츠 소비시간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 또한 쏟아지는 컨텐츠 홍수 속에서 가장 재밌는 컨텐츠를 고르기 위한 소비자들의 고민의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선택지를 아예 줄여버리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일까? 예상하겠지만 선택지가 너무 적은 것도 좋지 않다. 사람에게는 단일 대안 회피 성향이 있어서 적절한 비교 대상 없이 결정내린 선택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그만큼 만족도가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많은, 하지만 너무 많지도 않은 '할 것'들을 준비해왔고 순서대로 준비해온 카드들에 몰입하며 시간을 꽤나 수월하게 흘려보낼 수 있었다. 만약 책을 너무 많이 들고 오거나 드라마나 영화 종류를 너무 많이 가져왔다면 뭘 볼지 고르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빠져들지 못 한 채 비행기에서 어정쩡한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비행기가 책을 읽기에 최적의 공간인 이유 중 둘째로는생각의 방해꾼이 적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핸드폰으로 하는 시간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일부러 전화를 제외한 모든 알람은 꺼놓고 유튜브나 카톡같은 SNS 어플은 어플서랍 속에 숨겨놓고는 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알람을 꺼놓으니 오히려 핸드폰을 더 많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었다. 알람이 꺼져있기 때문에 SNS나 메일함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새로운 알람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생각에 보다 더 능동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행기라는 공간은 이런 무의식적인 생각을 완전히 차단해준다. 현실세계에 더해 인터넷이란 가상세계까지 확장된 세상에서 살고 있던 땅 위의 세상에서 벗어나 상공으로 올라오면 가상세계는 사라지고 온전히 내가 있는 공간만이 내가 존재하는 세상이 된다.







책이 지겨워질 때쯤 나는 머리를 좀 쉬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운받아 온 파리 브이로그들을 보기 시작했다. 브이로그를 보며 파리의 핫플레이스나 교통, 식사주문법, 기본적인 인삿말 정도 등을 무작정 메모장에 받아적었다.


나는 하루를 상당히 계획적으로 보내는 편이지만 여행에서만큼은 덜 계획적인 사람이 되곤 한다. 대학생 새내기 시절 떠났던 첫 일본여행을 To do list를 완수하고 오는 듯한 전투적인 여행처럼 떠났던 탓에 계획이 빡빡한 여행은 그 이후로 선호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행을 여러 번 다녀보며 여행하는 방법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핵심은 돈과 핸드폰 데이터만 있으면 괴한을 만나거나 오지에 떨어지지 않는 이상 어느 곳이든 문제없이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동선이나 효율성 등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항공권, 숙소, 가이드 예약 정도만 해두고 그 외에 교통이나 식당 등은 미래의 나와 구글맵 그리고 내 지갑에게 맡기기로 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예전에는 최대한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가성비 좋은 여행을 해야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어서 사소한 결정 하나하나 효율성을 따져보느라 여행계획 세울 때마다 머리가 아프곤 했는데 그러면서 배운 것이 있었다. 어차피 여행은 다녀오고 나면 지나간 여행에서 얼마를 썼는지, 동선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 따위와 같은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여행을 얼마나 좋게(?) 다녀왔는지 누구와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최고의 가성비 여행 콘테스트와 같은 것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이것도 최고의 선택들을 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니 문득 두려움이 몰려왔다. 우선 '처음' 가보는 유럽이었고, 그 '유럽'은 소매치기가 심하다느니,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느니, 주문을 할 때 절대 손을 들어서 웨이터를 부르면 안 된다는 등 옆 동네 가듯 해도 되는 일본여행과는 전혀 달랐다.


'이거 아무런 준비 없이 갔다가는 정말 길 잃은 미아처럼 되는 건 아니야?'


게다가 이번 여행메이트는 나에게 모든 계획을 맡기고 온 이모와 미국에서 유학을 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해외여행은 처음 가보는 우리 언니였기에 여행일정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고스란히 혼자 떠앉은 여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닥치는대로 여행 일정의 빈 공백을 언제든 채울 수 있도록 브이로그들의 맛집, 명소 리스트들을 구글맵에 저장해두기 위해 메모장에 적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머리를 쉬게 하려고 본 브이로그들을 마치 공부하듯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계획에 대한 압박이 몰려올 때 도움이 된 말이 있었다.



우리는 어딘가로 떠날 때 표면적 이유를 가지고 떠나지만 돌아올 때는 우리가 원하는지 알지도 못했던 내면적 이유를 찾아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계획대로 여행이 잘 끝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 바라지만 계획대로 완전히 완수되는 여행은 없다. 그리고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 또한 예상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무언가 깨닫고 기쁨과 행복을 찾아내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_김영하 ⟪여행의 이유⟫ p24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다. 운 좋게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다.

_김영하 ⟪여행의 이유⟫  p16


결국 어그러질 수도 있는 것이 계획이고, 어그러진 계획 안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얻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비행기에서 책을 너무 심취해 읽었던 덕분에 여행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다는 위안이 되었다. 그래 봐야 가려던 박물관을 못 가거나 길을 잘못 들어 택시비 몇 만원 깨지는 것일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만약 내가 이끌어야 할 여행메이트가 없고, 혼자 떠났던 여행이었다면 오히려 더 될대로 되라는 식의 마음 편한 여행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두번째 식사가 나왔고 그 때부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 푹 빠져들며 비행기에서의 하루를 뿌듯하고, 만족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파리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 전 파리 생제르맹 거리의 풍경. 뒷편으로 어스름하게 판테옹신전이 보인다.



-

Epilogue

2023년 1월 기준 파리행 아시아나 항공의 기내식은 진짜 진짜 진짜 정말로 맛있었다. 감탄하면서 먹었던 치킨로제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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