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자맹전> 관람 후기
전시회 취미 +1을 획득하였습니다.
유럽 여행에서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에서 투어를 듣고난 뒤 '예술'에 관심이 생겼다. 뭐, 원래 그림그리고 음악 듣고 하는 건 좋아했지만, 예술에 대해 공부하고 역사를 배경으로 음미하는 것의 세계는 또 달랐다. 빵순이의 버터 허영심에 책벌레의 지적 허영심에 미적 감각까지 끼워 넣고자 하는 허영심 덩어리는 오늘도 취미를 한 가지 더 채워 넣는다.
그로 인해 꾸꾸씨의 탐구영역에 한 가지 영역이 추가되었다. '전시회 감상하기' +1
곧 역사고 철학이며 세상의 변곡점과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나침반인 예술의 의미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시작해본다.
프로방스에서 온 댄디 보이
이번에 다녀온 전시회는 다비드 자맹전. 프랑스 여행 귀국 후 첫 전시회로 다비드 자맹전을 고른 것은 단순히 아름답고 활력 넘치는 색감의 그림들과 작가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전시회 정보 : https://booking.naver.com/booking/5/bizes/830056
프로방스에서 영감을 받아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맑고 쨍한 채색감의 그림들을 보면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와, 그림 예쁘다"하고 부담없이 감상할 수 있는 전시였다.
전시회장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왼편에 보이는 그림은 프로방스 에르브 광장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에르브 광장의 모습에서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의 나무 그늘 아래 싱그럽고 활기찬 느낌이 느껴졌다. 표정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풍경 속에 자신을 대입해보도록 이끌었다. 자맹이 에르브 광장의 평화로운 장면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생생한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방은 사람들의 표정은 없고 풍경이나 어떤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직접적인 표정 대신 인물의 역동적인 자세나 채색을 통해 장면의 느낌과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감정을 전달하는 듯했다. 이 그림만 봐도 격정적인 오케스트라 연주라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연주자들 손끝에 핏방울이 튈 정도로 격정적인 연주를 할 것만 같은 느낌.
자맹은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QR코드를 통해 그림과 함께 들으면 좋은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배경 역사를 모른 채 본 그림의 해석입니다!
다비드 자맹전의 두 번째 방인 댄디 보이 방의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은 순전히 그림을 보고 느껴지는 나의 감정과 생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림을 둘러 보고 난 뒤 방의 그림들의 배경 설명과 자맹이 그린 '댄디'라는 인물의 역사적 배경을 찾아보니 댄디의 멋드러진 양복에 담긴 의미는 내가 생각한 것과 사뭇 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댄디 보이의 양복과 평온한 표정을 보고 떠올린 것은 사회적 의무의 속박에서 자유롭고자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MZ세대였지만, 댄디즘의 시작은 '멋쟁이 스타일'을 통해 어떤 목적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 목적에는 단순 치장을 통한 허세부터 깊은 예술/철학적 의미까지 다양한 변화를 거쳐왔고, 이에 대해서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그림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가 감상자의 경험이나 지식 수준 혹은 문화에 따라 판이하게 다양할 수 있음을 몸소 체험한 격. 물론 그렇기에 문화예술 평론가들은 예술작품에 가치를 매기기 위해서 예술사나 작품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기본일 테다.
그럼에도 [내가 느낀 감정]과 [예술가의 의도나 숨겨진 배경, 다수의 의견]과의 간극 차이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댄디 보이와 MZ 세대
두 번째 방은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적대심을 가진 특정 그룹, 댄디를 그린 방이다. 처음에는 댄디가 뭔지 몰랐는데, 우리가 흔히 스타일이 <댄디하다>라고 표현할 때의 그 댄디, 맞다.
댄디가 뭔지 모르는 나는 열심히 그림을 해석해보려고 했다.
처음에 양복을 입은 남자가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모습이 가만 보면 어딘가 역설적이었다. 산책이라는 여가 활동에 대비하여 통상적으로 딱딱하고 경직된 생활상을 대변하는 양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옭아 맨 양복은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과 자유를 표방하듯 역동적인 동작에서 그의 평화롭고 신이 난 내면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다 들어와”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댄디가 입은 양복은 19세기 산업사회 노동자의 짐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라면 작업복을 입었을 것이지, 21세기 사무직 노동자와 같이 양복을 입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댄디 보이를 보고 순간적으로 든 나의 감상과 실제 댄디 보이가 의미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21세기의 '양복'에 대한 이미지가 19세기 '양복'의 의미와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양복]으로부터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에 생계를 위해 산업사회라는 거대한 기계 속 톱니바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그 시대 사람들의 사회적 짐을 느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느낀 것은 사실 21세기 현대인의 짐이었다.
초기 댄디에게 [양복]은 사실 올가미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예술적 지성을 드러내는 패션 수단이었다.
이는 19세기 영국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양복을 입는 사람들은 부르주아나 귀족 혹은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즉 상류층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양복도 대중화되며 계층사다리를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본 스타일적 에티켓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현재 양복은 <댄디한 스타일>을 위한 패션 수단으로도 활용됨과 동시에 <출근복장>으로 정착된 것처럼 더욱 보편화된 복장이라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자맹이 그린 댄디 보이는 '멋쟁이' 댄디 보이였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 양복을 보면 아직까지 나는 <9-6 근무>와 <야근>이 떠올랐나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시간과 공간의 속박으로 인해 결여된 자율성을 회복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탈출구를 찾고 있는 MZ 세대를 보았다.
자맹이 오랫동안 탐구해온 댄디 보이란 누구일까? 부르주아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댄디라는 계층은 처음 들어봤다. 한국 사회에서 mz, x세대, 밀레니얼세대로 특성별로 인구 집단을 나누듯 이들 또한 18세기 말 영국에서 등장한 신흥 계층이었다.
지금은 <댄디하다>라고 한다면 깔끔하고 멋스러운 캐쥬얼 정장 스타일에 젠틀한 패션의 신사 모습이 떠오른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겉치레와 같은 외적 치장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설명이 나오듯 한마디로 21세기 현재 우리에게 <댄디하다>는 멋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댄디의 시작은 단순히 멋쟁이를 묘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18세기 이전 유럽 사회에서는 ‘멋쟁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귀족이었다. 당시의 멋쟁이의 치장이라고 하면 루이 14세와 같은 왕족의 화려한 옷차림새를 떠올릴 수 있는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댄디하다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댄디즘이 멋쟁이 옷차림을 표상하는 단어인 것은 맞지만 댄디즘 또한 시대와 함께 변화를 겪게 된다.
18세기 말 민주주의가 발흥하며 기존의 신분제 사회는 몰락하고 귀족의 위치가 위태로워진 가운데, 산업혁명 시대의 결과로 떠오르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능력으로 돈을 번 부르주아 계층이 급부상하게 된다.
이 때, <우아한 넥타이 매듭의 창안자> 조지 브러멀은 영국 사교계 속 귀족과 부르주아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패션과 매너를 발명한다. 그리고 이것이 <댄디즘>의 시작이었다.
이에 따라 댄디들은 타고난 패션 센스와 예술적 교양을 통해 사교계에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
때때로 지나치게 차려입는 일에 대한 유일한 속죄는 항상 지나친 교양을 선보이는 일이었다.
_ 오스카 와일드
신분제사회가 물러나고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며 부르주아 계층은 새로운 상류층으로 급부상했지만, 귀족도 부르주아에도 속하지 못한 집단이 자신들에게 댄디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너희는 돈만 밝히고 이런 예술적 교양은 없지? 훗"
하는 생각이었던 것일까.
그렇다. 조지 브러멀의 영국식 댄디즘은 사교계에서 무시받지 않기 위해 창안한 결과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다.
“난 돈만 밝히는 부르주아도, 귀족도 아니고 <예술을 아는 멋쟁이>야”라고 외치며 위치가 애매한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조지 브러멀적 댄디즘은 기존의 주류 문화에 냉담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사실은 자신도 그 '주류'에 속하고자 선망했던 내면의 욕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겉치레 위주의 초기 댄디즘은 19세기 초반 프랑스로 건너가게 되며 변화를 겪는다.
도래하는 자본주의에서 넘쳐나는 '물건'들과 예술작품의 미적 가치가 '가격'에 의해 정해지며 예술의 의미와 예술가의 창작의 자유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주류 문화에 반기를 드는 댄디즘을 통해 자본주의에 휩쓸리는 세상에서 고고하게 예술가의 자존심을 드러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댄디즘의 '겉치레와 예술적 지성의 과시'라는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모호해진 정체성을 구분짓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점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댄디즘>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작가, 예술가, 철학자 등 수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의미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은 이것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 댄디즘의 의미 또한 변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댄디즘은 오히려 200년을 거슬러 초기 화려함과 겉치레적 허세에 가까웠던 18세기 말의 댄디즘과 비슷하다고도 한다. 나의 존재감과 자존감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명품이 사용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하지만 외적 치장을 통해 내면의 자존감을 세우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란 말은 아니다. 더불어서, 수많은 의미 중 한 가지를 기억한다면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한 구분선>으로서의 댄디즘을 기억하고 싶다.
핸드폰만 열면 내가 모르는 것들과 알아야 할 것들, 멋지고 능력 좋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수많은 정보와 인재가 넘실거리는 세상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 먼지처럼 작고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북적이는 지옥철 퇴근길에서 밀려나듯 출구로 배출된 뒤 집으로 걸어올 때면 'Me'가 아니라 'Somebody'가 된 기분이 들 때도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구분선>으로 사용된 댄디즘의 의미를 기억한다면, 난 정말 좋을 것 같다. 나를 지키기 위한 구분선은 패션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든든한 가족을 떠올리는 일, 주말에 좋아하는 카페에 가는 일, 혹은 새벽 출근 '덕분에' 핑크빛 일출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처럼 나를 지켜줄 구분선이 무엇일지 떠올려보자.
더불어서, 사회적 속박 안에서도 충분히 자유와 담대함, 내가 나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의 문제는 사회적 구조탓만도 아니고, 마음의 문제만도 아니며, 해답은 그 둘 사이 어디쯤 있다고 생각해요.
_ 유시민 <알쓸신잡 시즌1>
세상살이, 생각하기 나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