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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Dec 19. 2015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팔레트 스왑 시대의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용어 중에 ‘팔레트 스왑(Palette Swap)‘이란 단어가 있다. 고전게임에서 부족한 메모리를 아끼기 위해 캐릭터나 배경의 색만 바꿔 표현하는 방법이다. <슈퍼마리오>에서 2P 플레이어인 루이지가 마리오에서 빨간색을 초록색으로만 바꾼 일. <갤러그>에서 적들이 색만 바뀌어 끝없이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팔레트 스왑의 사례에 해당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의 팔레트 스왑이라고 볼 수 있다.


<깨어난 포스>는 <새로운 희망>의 캐릭터를 그대로 본 땄다. 부모님의 부재 속에 황량한 모래행성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레이는 타투인의 루크 스카이워커, 그리고 저항군에게 꼭 필요한 지도를 건내주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는 BB-8은 R2D2. 스톰트루퍼였다가 저항군에 투신하는 핀은 밀수업자지만 장군이 되는 한 솔로, 모종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방황하다가 주인공을 돕지만 결국 목숨을 잃는 한 솔로는 오비완 캐노비. 그리고 스승을 배신하고 어린 제다이까지 쓸어버리며 다크사이드에 물든 카일로 렌은 다스베이더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실 캐릭터의 팔레트 스왑은 큰 문제가 아니다. 스타워즈 시리즈가 현대의 신화로 남은 것은 톱니바퀴 맞물리듯 꽉 짜인 연출이 근본은 아니었다. 우주 최고의 가족 막장극이라고 불릴 정도로 톡톡 튀는 캐릭터의 힘과 그로 인한 매력적인 세계관 덕분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최고의 악역 자리를 고수하는 다스베이더뿐 아니라 루크, 레아, 한 솔로, 요다는 다소 헐거운 연출을 충실하게 메꾸는 것은 물론 오히려 더 애정을 갖게 팬덤을 탄탄하게 만드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문제는 <깨어난 포스>가 오리지널 시리즈의 개연성 낮은 연출까지 팔레트 스왑까지 계승했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 개연성의 부재는 클라이막스에서 우주적 스케일로 느껴야할 감동의 결여로 이어진다. 데스 스타보다 수십배 커진 퍼스트오더의 궁극병기 스타 킬러가 고작 게릴라 몇 명과 엑스윙 몇 대에 의해 무력화 되는 일. 우주 최고의 제다이인 루크마저 막을 수 없던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이 어제까지는 포스가 뭔지도 모르던 소녀와 일개 스톰 트루퍼에게 밀리는 모습. 30년 전이라면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 전개였지만 지금 보면 허탈감만 낳는 맥 빠지는 전개였으며 2시간 동안 쌓아온 캐릭터의 위엄마저 폭삭 가라앉히는 무리수다. 


망해가는 프랜차이즈 살리기에 도가 터서 ‘프랜차이즈 제세동기‘라는 별명까지 얻은 J.J 에이브람스지만 이번 작품에는 실망을 거둘 수 없다. 은하제국이나 퍼스트오더가 저항군을 대하던 태도처럼 ‘저항군이 데스 스타만 부수면 좋아할 거 아니냐’는 안이한 생각으로 <깨어난 포스>를 만들었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또한 2시간 15분이란 러닝타임 동안 새로운 시리즈가 오리지널과 다른 스토리를 보여준다는 어떤 힌트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은 새로운 팬의 유입이라는 면에도 큰 약점으로 작용할 것 같다. 


팔레트 스왑은 상상력은 풍부했지만 기술의 한계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던 시대의 비극이다. 상상력을 뛰어넘는 기술력을 갖추고도 팔레트 스왑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스타워즈라는 독보적인 세계관 위에 캐릭터만 얼굴만 바꿔서 묻어가겠다는 꼼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장 극장에서 <깨어난 포스>를 보며 앞으로 개봉할 에피소드8,9 역시 추억 속 캐릭터와 메카닉이 등장하는 순간 잠깐의 감동은 느낄 수 있을지언정, 세대를 초월한 커다란 울림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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