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평단의 호평에 비해 <겟 아웃>은 특출난 부분을 발견하기 어려웠고 <어스>는 참신한 설정과 초반부의 오싹한 분위기에 비해 뒷심이 너무 부족했다. 그렇게 별 기대없이 봤던 <놉>은 조던 필에 대한 내 감상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영화사를 다시 쓰겠다는 야심을 발칙한 상상력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결과물을 구현해내는 집요한 뚝심이 있었기 때문. 다음에는 또 어떤 대담한 시나리오로 영화계에 긴장감을 불어넣을지 기대된다.
올해의 자극_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보고 나와서 40살이 되기 전엔 단편영화를, 아니 시나리오라도 한 편 꼭 써보자고 다짐했다. 가벼운 변주가 일으키는 폭발적인 변화, 그에 따라오는 몰입감은 창작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에게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물론 사소해보이는 변주를 만들기 위한 고민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을지도 짐작은 가지만. 소박한 SF적 설정과 담백한 대사만으로 캐릭터의 상처와 희망을 전달하는 세 번째 에피소드 ‘다시 한 번’은 영화적 마술이 벌어지는 비결을 깨달은 영화도사의 가볍지만 진한 에센스.
올해의 다정함_<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다니엘 콴/다니엘 쉐이너트
인류를 대표하는 명문장가가 아무리 기똥차게 묘사한다고 해도 몇 줄의 자막과 돌과 사막이 나온 사진 몇 장이 창조해낸 감동을 대체할 순 없을거라 확신한다. 도넛의 원심력과 눈알의 구심력. 이렇게 핵심을 요약해도 영화를 직접 봐야만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영화다운 영화였다. 내가 지나오고 지나올 인생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을 응원하고 기대하게 만드는 다정한 영화
올해의 이별_<헤어질 결심>, 박찬욱
박찬욱 감독은 원래 고전과 합이 좋았다. 깐느박 전설을 시작한 <올드보이>도 오디이푸스에 빚을 졌으니까. <헤어질 결심>은 죽은 에우리디케를 되살리려 스스로 지옥까지 내려갔지만 끝내 믿음이 부족했던 오르페우스의 각색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자력으로 돌아가는 현대의 산을 넘고 바다를 지나 박찬욱이 마침내 도달한 신화의 세계는 미련을 잔뜩 머금은 안개로 자욱하다. 그 신화적 세계에서 눈을 뜨지 못한 나는 허우적 대는 미결로 남았을 뿐이고…
올해의 시네마_<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기어코 ‘바냐 아저씨’가 무대에 오르고 그 대사가 연출될 때 숨소리마저 멎었던 극장. 걸작을 함께 감상했다는 고양감으로 가득했던 엘리베이터. 심야에 혼자 운전을 하고 귀가하며 장면, 장면을 곱씹던 나. 코로나로 인한 경영난으로 티켓값이 오르고 스판을 입은 영웅들만 상영회차를 채워도. <드라이브 마이 카> 같은 작품이 있어 오늘도 희망을 안고 극장으로 향한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한 올해 단 한편의 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