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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Jan 18. 2017

내맘대로 2016년 최고의 해외영화 TOP10

<스포트라이트>에서 <에브리바디 원츠 썸>까지

<그래비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라는 압도적인 1위가 있던 예년과 달리 고민이 많았다. 좋은 영화는 역시 많았지만 가슴을 때릴 만큼 매혹된 작품이 없어서 아쉽던 한 해. 순위를 나누긴 했지만 1-4위, 5-10위 그룹 내에서는 사실 차이가 없다.

가만히 살펴보니 주토피아를 빼고는 장르도 전부 드라마다. SF/환타지는 변변한 개봉작이 기억나지 않고 히어로물은 <시빌워>가 괜찮긴 했지만 마블영화의 식상함은 지울 수 없었고, <엑스맨: 아포칼립스>, <배트맨v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는 팬심을 섞어서라도 좋은 영화라고 보기 어려웠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내년에는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 커버넌트>,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라이언 존슨의 <스타워즈 에피소드8> 등이 대기 중인데 블록버스터의 부활을 당당히 선언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10위: 에브리바디 원츠 썸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


“<보이후드>보다 이 영화에서 이 대사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You don’t seize the moment; the moment seizes you.‘“


한 마디로 표현해서 ‘유쾌한 영화’다. 세상물정 모르고 어리버리한 신참, 그 신참을 골려주며 즐거워하는 떠벌이 고참들, 주변이 뭐라든 개똥철학을 늘어놔 그것만으로도 골 때리게 웃기는 괴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술과 파티, 80년대의 노래와 춤, 남자와 여자가 쉴 새 없이 등장해 그야 말로 혼을 빼놓는다.

하지만 캐릭터는 거들뿐. 영화의 유쾌함은 배경의 역할이 훨씬 크다. 대학교 입학식 전을 3일간을 다룬 영화에서 불안함을 표현하는 건 어떤 명감독이라도 어렵지 않을까. 80년대와 2000년대라는 차이를 뛰어넘어 주인공들처럼 신나는 대학생활을 보낸 내가 이 영화를 보며 신입생 시절을 떠올리고 추억에 젖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나던 날 그때가 너도 가끔 생각나니.“ 윤종신의 명곡 ‘오래전 그날’ 첫 문장인데, 삶에 지치고 힘든 순간이 온다면 ‘오래전 그날’을 들으며 우수에 젖는 대신 <에브리바디 원츠 썸>으로 치기 어린 시절(혹은 흑역사)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9위: 카페 소사이어티 (우디 앨런 감독)


“어느 시인은 꿀맛이 달콤한 이유가 꾼 맛이나 꾸는 맛이 아니라 미래에 올 맛이기 때문이랬다. 그렇다면 꿈맛은 어떨까”

<카페 소사이어티>는 우디 앨런의 다른 작품보다 좋은 작품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인가. 그것도 아니다. 우디 앨런의 모든 작품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열댓편을 본 입장에서 판단하기에 범작 혹은 평작의 영역에 걸쳐 있는 게 <카페 소사이어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위에 올린 것은 최신 개봉작을 많이 접하지 못한 개인적 사정이 크다. 그렇다고 딱히 이 영화를 밀어내고 10위권에 밀어넣을 작품도 생각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내가 이 영화에 9위를 준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다’는 우디 앨런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인물들을 우디 앨런은 몇 십년간 매력적으로 포장해왔고, 관객들은 그상황을 즐기러 갔다. 눈부신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한 눈에 반한 바비(제시 아이젠버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며, 바비와 보니의 주변 인물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겪는다. 그 어쩔 수 없음이 공감된다면 영화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영화의 원형이라고 생각되는 <한나와 그 자매들>처럼 빛나는 장면들이 없었지만 나는 충분히 공감이 됐다.

덧붙여 우디 앨런이 본인의 새로운 아바타로 제시 아이젠버그를 고른 것 같은데, 탁월한 자기미화였다고 생각한다. 헐리우드에서 제시 아이젠버그만큼 지적이고 수다스러운 캐릭터를 잘 소화할 수 있을지 아직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잘생쁨, 1930년대 LA와 뉴욕의 화려함을 카메라에 담아준 비토리오 스토라로 촬영감독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8위: 줄리에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이베리아 반도가 희극의 무대로 얼마나 근사한 곳인지 다시 한번 깨달음”

작년에 화제가 됐던 TV클립이 있다. SBS <판타스틱 듀오>에서 양희은과 악동뮤지션이 함께 한 ‘엄마가 딸에게’ 듀엣 무대다. 엄마가 딸에게 하는 당부와 미안함을 담은 편지 형식의 곡인데 두 가수는 (남자인 내가 잘 모를) 엄마와 딸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훌륭하게 표현해 많은 시청자의 눈물을 자아냈다. 이를 김혜리 기자의 <줄리에타>의 평으로 옮기면 “어머니의 인생은 어쩌면 딸에게 보내는 긴 편지”가 될 것이다.

줄리에타와 딸 안티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정말 우연찮고 사소한 일들에서 시작되기에 관객은 둘을 지켜보며 더 어쩔 줄 몰라 하게 되는데, 이때 알모도바르 감독이 사용하는 극적장치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힘을 뺀 거장의 은은한 향취를 느끼게 한다. 실제 영화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따라 진행되는데, 이를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하며 극에 긴장감을 더하고 몰입감을 증폭시킨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표현하는 전통적으로 소재들인 열차와 배도 현대극에 맞게 잘 배치되어 있어 극의 깊이감을 선사한다.

더불어 고향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배경탐색과 눈을 시리게 하는 화려한 색감으로 고전 희극의 무대로 이베리아 반도가 얼마나 매력적인 공간인지 보여준다. 알모도바르의 팬이라면 곳곳에 박힌 그의 인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에 대한 낭만이 별로 없는 나조차도 저 곳에 한 번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스페인 여행에 깊은 추억을 남긴 사람들은 최대한 관람을 자제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7위: 설리: 허드슨강의 기억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24분이 아니라 24,000분을 줘도 안 될 일은 안됨”

재난을 소재로 다룬 영화를 보는 건 괴로운 일이 됐다. 하늘과 바다, 땅과 우주 어디에서나 세월호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화를 소재로 다룬 영화라면 더욱. 그럼에도 시선을 마주쳐야 하는 것은 아직도 세월호의 진실을 진도 앞바다에서 건져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지지선언을 하며 물음표를 갖게 만들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국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진짜 보수주의 이상적 모습을 그려간다.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고 본인의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 한 마디로 핑계를 대지 않는 인물이 그가 만드는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본분을 다해 위기상황을 해결하는 모습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전개하며 설득하는 과정에서 품격 있는 보수의 가치가 전달된다.

사건 후에 설리가 느끼는 혼란이나 자책감은 캐릭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데 특히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세월호, 메르스, AI가 터진 후에 자칭 보수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사건 수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고, 또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행동했는지 같은 비인간적 면모들을 한국의 관객들은 너무 많이 봐왔기에, <설리>가 주는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현 정권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6위: 다가오는 것들 (미아 한센-러브 감독)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해온 것'들에서 시작한다”

옛날에는 재수 좋으면 100살까지 살았는데, 요즘은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산다. 몇해 전 작은아버지가 했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운이 좋아 60세 정년을 채운대도 남아있는 40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막막하기 때문에 ‘나는 80살에 죽을 거야’를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너는 80살까지도 못 살거야’라는 기운 빠지는 대답이 돌아오긴 하지만.

<다가오는 것들>은 다가오는 황혼기에 관한 영화다.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철학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는 평범한 시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랑, 경력, 가족관계에서 이전에 겪지 않았으리라 예상되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다. 시간차를 두고 벌어져도 낙담할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면에서 재작년에 흥행을 거둔 <인턴>과는 같지만, 다분히 우리도 할 수 있을 법한 방식들로 문제를 해결해간다는 점에서 결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프랑스의 철학교사’라는 배경이 ‘한국의 독거노인’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왜 사회안전망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시스템이 구축됐다고 무조건 행복하지도 않은 게 삶이다. 그 동안 쌓아온 개인의 자산을 활용해 황혼기의 위기들을 담담하면서 단단하게 헤쳐가는 나탈리의 모습에 적잖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렇고.



5위: 라라랜드 (다미엔 차젤레 감독)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려 한다고 괜한 헛수고라 생각지는 말아요. 정상이 없는 산을 오르려 한다고 나의 무모함을 비웃지는 말아요.”

‘꿈’이라는 소재는 어쩌면 영화의 본질적 딜레마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너무 다가서면 다큐멘터리가 되고, 이상으로 무게추가 너무 기울면 그야말로 영화가 되기 때문이다. 개인 취향이 있기 때문에 쉽게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 발을 디디지 않은 작품도 관객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그런데 <라라랜드>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꿈과 현실의 줄타기를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성공적 줄타기에서는 일단 장르와 캐릭터, 배경이 큰 역할을 한다. ‘꿈의 공장’이 있는 LA에서 배우와 뮤지션 지망생이 만난다면 어떤 영화 같은 사건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이 처음 만나는 고속도로가 춤과 노래로 가득해도 뮤지컬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리니치 천문대가 환상적 공간으로 변하는 것도 오케이. 관객이 무슨 상황이든 영화로 받아들이게 할 준비를 마친 감독은 주저 없이 현실을 끼얹는다.

꿈과 현실에서 타협해야 하는 주인공들. 좋게 말해서 고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진부하다. 일렬로 세우면 끝도 없을 이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유는 이 고민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며, 무덤에 이르기까지 벗어날 수 없는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캐릭터들의 성공은 전적으로 감정이입에 달려있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각자의 선택이 틀리지 않다는 점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관객에게 설득하는데, 이 부분에서 감독은 춤과 노래를 잠시 멈추며 영화적인 타협과 거리를 둔다.

그리고 마지막 10분. 영화적으로 표현할 부분과 현실로 남겨둬야 할 부분을 철저하게 구분시켰던 이유가 밝혀진다. 찰나의 순간 펼쳐지는 꿈과 현실의 결합.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듯 마지막 10분에서 황홀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낀 것은 극장을 들어서며 잠시나마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언젠가 끝나고 만다는 현실이 그 장면에 반영되어서가 아닐까.



4위: 로스트 인 더스트 (데이빗 맥킨지 감독)


“이런 걸 뭐라고 불러야할까...서브프라임 웨스턴?”

경험이 기억으로, 기억이 기록으로 변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10년 동안 금융위기의 상처를 녹여낸 작품들은 꾸준히 우리를 찾아왔다. 2011년의 <테이크 쉘터>처럼 무너진 중산층의 공포를 묵시록적 시각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고, 2015년의 <빅 쇼트>처럼 현미경을 들이대어 복기하는 방식도 있다. 예로 들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작품이 이 기록에 한줄 보탰을 것이다.

<로스트 인 더스트>도 경험을 기록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다. 눈여겨 볼 것은 이 상처를 다루는 영화적 방법론이 철저히 고전적이며, 이 고전적 시도가 영화의 소재와 찰떡궁합이라는 것이다. 금융위기 때문에 은행담보로 넘어간 농장을 지키기 위해 은행을 터는 형제. 그리고 은행에 보관된 현금이라고는 천 달러 남짓한, 이미 망해버린 서부 텍사스에서 그들을 잡으러 동분서주하는 은퇴 직전의 보안관. 사회적 죽음을 언도 받기 직전인 형제와 보안관이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장르의 존폐가 위협받는 웨스턴만큼 어울리는 게 있을까.

이 영화는 장르의 적절한 활용법 말고도 세밀한 부분들에서 빛이 난다. 특히 보안관의 관계가 흥미롭다. 백인과 원주민으로 이뤄진 팀의 인종적, 정치적, 종교적 정체성의 대조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에 유머러스함을 불어넣고 한물 가버린 웨스턴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숨통을 틔워준다. 개인적으로도 작년에는 의도치 않게 웨스턴을 많이 접한 한 해였는데, 끊임없는 웨스턴의 변주가 반갑기도 한 작품이었다.



3위: 주토피아 (바이론 하워드, 리치 무어 감독)


“'주디와 닉의 주토피아'보다 이 영화를 보며 커나갈 '우리 아이들의 세계'가 기대된다”

<겨울왕국> 때는 디즈니에 놀랐지만 <주토피아>는 무서울 정도였다. 두 작품 모두 좋은 영화였지만 왕자가 필요 없는 주체적 공주보다 약자 순수주의라는 편견을 깨는 세계관을 설득력 있게 구성하는 게 훨씬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의 디즈니라면 <주토피아>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아마 초식동물인 주디가 뛰어난 능력과 매력을 가진 조력자 닉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육식동물 사이에서 겪는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는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흙수저의 자수성가다.

하지만 <주토피아>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흙수저가 금수저가 되는 과정에서 왜곡될 수 있는 세계관을 건드렸다. 강자지만 소수인 육식동물이 받아야하는 편견의 시선과 약자이지만 다수로 얻게 초식동물의 헤게모니를 과장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사회구성원으로써 한 명의 인물이 갖게 되는 다양한 역할을 자연스럽게 설명한 것이다. 완벽하게 선하거나 악한 개인은 적어도 <주토피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다.“ 이규석 작가의 <송곳>에 나오는 대사다. ‘선한 약자vs악한 강자’ 프레임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문제를 낳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하지만 <주토피아>로 세계관을 형성할 아이들은 적어도 우리 세대보다는 저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않을까.



2위: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평하면서도 썼는데 내가 생각하는 퀴어 영화의 최우선 목표는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것 같다. 최근에 많은 국가에서 동성애가 인정받고 있지만 그래도 수많은 편견이 따라붙는 게 사실이다. 세부적인 편견 중 하나는 ‘동성애자의 연애는 우리와 다르다’일 것이다. 동성애 반대 시위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동성애자는 변태성애자‘라는 주장은 단지 표현의 수위가 높을 뿐이다.

<캐롤>은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우아하고 품격 있는 교보재다. 딸을 두고 이혼소송 중인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삐걱거리던 테레즈(루니 마라)의 운명적 만남과 황홀한 연애 장면은 성별만 남/여로 바꾼다면 올해 나온 어떤 로맨스 영화보다 아름답게 두 개인의 다뤘다.

이 영화의 훌륭한 점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로맨스 서사를 풀어내면서도 1950년대 미국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동성애를 핍박하고 거부했는지. 또 동성애를 숨기기 위해 어떤 비극적 노력들이 있었는지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창으로 시작하는 오프닝 씬이라던가, ‘창문’이라는 매개체를 지나야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모습 등은 영화라는 매체가 문학과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마지막으로 헐리우드와 충무로의 소재고갈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남-남 캐릭터에 대한 대중의 지루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양성평등이라는 윤리적·사회적 목표를 떠나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통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게 장기적인 영화산업발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1위: 스포트라이트 (토마스 맥카시 감독)


“입조심을 강조하되, 덮어놓고 입을 닫는 것이 늘 무난한 태도일 수는 없다.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이 경솔함과 무례의 소치인 것 못지않게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 역시 나약하거나 생각이 모자란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침묵의 기술』


다른 직종은 어떤지 모르겠으니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언론만큼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처럼 중요한 직종 없는 것 같다. 결코 많은 경우는 아니지만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게 언론의 가치를 더 높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언론학을 배울 때 프레이밍 이론을 가장 먼저 배우는 건지 모르겠다.

<스포트라이트>는 언론학도에게 말하지 않고 보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재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보스턴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팀이 보스턴 교구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한다. 당연히 취재 도중에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와 마주치는 것이다. 그리고 매순간 그들은 침묵을 선택한다.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침묵의 수혜자다. 일단 가톨릭 사제들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법적 처벌을 받았다. 보스턴글로브는 약간의 수혜를 받았다. 특종을 터트려 이목을 집중시켰고 언론계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까지 수상한다. 하지만 이 역시 많은 특종들 사이에 묻혀 과거의 영광으로 남을 것이다. 결국 침묵의 최종 수혜자는 피해자들이다. 피해자들은 아마 과거의 끔찍한 기억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 팀을 통해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은 그 기억과 평생토록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다.

‘가톨릭 보스턴 교구 아동 성추행 사건 피해자‘에게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시민도 어울릴 것이다. 언론의 역할은 시민의 알권리 충족시켜 공공선의 확립하는 것이다. 알권리의 충족이 반드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과거를 낱낱이 밝히는 일이 될 필요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담담하지만 굳건하게 밀고 나간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엔딩이다. 소재와 형식을 화학적 결합을 통한 폭발적인 시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럴 때면 항상 한국영화와 비교하는 게 미안하기도 한데, 언론을 다룬 영화에서 ‘SNS를 통한 폭로’를 엑스 마키나로 써먹는 최근의 충무로는 정말 반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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