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주의의 유혹을 뿌리치다
정희진 선생님이 강의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옮겨보자면 자신은 항상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다는 거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부장제에 순응해버린 여성들 사이에서는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그리고 LGBT 사이에서는 이성애자라는 이유로. 그래도 이성애자인 네가 우리보다는 낫지 않냐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며.
정희진 선생님이 자신의 경험을 말한 의도는 뭘까. 너보다 힘든 사람도 있으니 닥치라는 건가. 물론 아닐 것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우리는 나보다 어려운 상황을 겪는 사람을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는 곧 <문라이트>가 던지는 질문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흑인 동성애자를 상상해 본 적이 있을까.
떳떳하게 말할 건 아니지만 단언컨대 내 삶에서 단 1분 1초도 흑인 동성애자의 존재를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내가 그려낼 수 있는 동성애의 범주도 동아시아 3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몽골리안 계열의 황인. 그리고 영미권의 문화를 통해 자주 보는 코카서스 계열의 백인이었으니까. 마이클 잭슨이 동성애자라는 루머를 믿었던 적도 있었지만 마이클 잭슨은 흑인이기 전에 인종과 성을 뛰어넘은 슈퍼스타일 뿐이었다.
<문라이트>를 만난 건 행운이다. ‘흑인 동성애자’라는 흔치 않은 소재를 가지고도 자극적인 소재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영화로 내가 상상할 수 없던 이들의 삶을 거칠게나마 스케치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일이 내 삶에서 자주 일어나지 않기에 더욱 부끄럽다. 사회에 짓눌려 퍼렇게 질린 이들이 내 삶에 불쑥 등장할 때까지 나는 얼마나 무신경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