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일>이 감성팔이 영화가 아닌 이유

윤리적 고민이 스크린에서 생겨나는 순간

by 고요한

<생일>은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이룬 가족이 주인공이다. 설경구, 전도연이라는 명배우가 주연이지만 관람이 꺼려지는 건 벌써 세월호를 소재로 상업영화로 만들 수 있냐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동행자에게 ‘괜찮겠냐’, ‘볼 수 있겠냐’고 묻고 예매한 영화는 극히 드물다.


그런 우려 속에서 동행자들과 <생일>을 봤고 ‘좋은 영화 잘 봤다’는 이야기를 하며 극장을 나왔다. 이미 <밀양>에서 아이를 잃은 엄마를 연기했지만 이후로 실제로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전도연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 순남을 앞서가지 않을까 걱정됐다”고 말했고, 이종언 감독은 촬영기간 동안 ‘가만히 떠서 옮겨 담은 것 같은 영화를 만들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자신의 해석이나 재능을 과시하는 영화적 연출 때문에 유가족이 또 다른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위로를 받는다. 어떤 종류의 위로인가하면,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나보다 앞서 그리고 더 깊게 고민한 사람이 건네는 위로다. 내게 <생일>은 꺼려지는 현실을 먼저 마주하고 용기 내어 위로를 건네는 어른의 영화였다. 결정은 쉽지 않겠지만 많은 이들이 위로를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




극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기획 덕분에 과시적인 연출은 없지만 작품이 심심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특히 기억에 남는 기획은 정일(설경구)에게 부여된 설정이었다. 정일은 참사로 인해 아들을 잃은 유가족이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2년 만에 가족들 앞에 나타난다.


정일은 도대체 왜 2년 만에 나타난 유가족이 됐을까. 나만 궁금했던 게 아니었는지 이동진 평론가의 진행으로 이뤄진 GV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종언 감독은 세월호에 대한 부채감은 있지만 한편으로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시민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텔링(telling)이 아니라 쇼잉(showing)이 중요하다’는 격언을 이렇게 다시 발견한다.

어쨌든 상업영화니 재미요소를 꼽는다면 단연 배우들의 연기를 꼽고 싶다. 설경구를 보면 ‘설태식이 돌아왔구나~ 반갑다!’라는 대사를 하고 싶다. 강철중의 아류에서 벗어나 박하사탕을 떠올리게 하는 소시민 설경구는 역시 대단한 배우다.


그리고 전도연. 가슴 속에 지옥을 품고 사는 인물을 이렇게 잘 표현해내는 배우가 지구에 또 있을까. 어느 장면에서든 관객의 눈물샘을 짜내는 문자 그대로의 치트키.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출연을 결심했다는 건 곧 영화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 정치적 공방, 그로 인한 상처까지 오롯이 감당하겠다는 의미”라며 “그동안 감당해 왔고 앞으로도 감당할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녀의 팬으로 <변호인>, <택시운전사>의 송강호처럼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대표 캐릭터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하고는 했었는데, 이제는 단 하나의 아쉬움도 없다.




‘순결한 피해자‘라는 허상을 구성하는 절대적 요소가 뭘까. 사익추구와 정반대에 있는 공익성? 때 묻지 않은 천사 같은 순진무구함? 내 생각에는 배트맨에게 “You complete me”라고 말하는 조커의 말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피해자를 보며 ‘나는 저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순결한 관찰자를 자처하는 확신. 그게 바로 순결한 피해자를 구성하는 절대요소다.


영화를 포함한 매스미디어는 이 부분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내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감정이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간편한 절대악 캐릭터를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부산행>에서 김의성이 연기한 캐릭터 ‘용석’은 그런 하나의 예시다.


‘전대미문의 재난이 대한민국을 덮친다!’라는 홍보문구가 말하는 <부산행>은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를 정직하게 은유한 작품이다. 좀비 떼의 등장이라는 재난 자체보다 재난 이후 마비된 사회의 시스템. 그 안에서 우왕좌왕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에서 느끼는 공포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함축한 게 ‘용석’이라는 캐릭터였다.


나는 인간의 윤리적 분기점이 악인에게 돌을 던지는 순간이 아니라, 나도 악인일까 아닐까 고민하는 지점에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석을 바라보는 관객이 과연 그 고민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을까. 압도적인 재난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을 희생도 서슴지 않는 절대악인에게 말이다. 따라서 <부산행>이 상업적 성공은 거두었을지 모르지만 선명한 은유를 통해 사회적 반성을 이끌어냈는지는 물음표가 생긴다.

<생일>은 <부산행>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을 택한다. 너무나 사소한 악. 악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생활인의 불편과 짜증을 그려내는 방식. 말기암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정부보조금을 받고 다른 유가족들의 전화를 피하는 유가족. 정부에 진실을 요구하는 유가족이 오랜 만에 추모공원에 모여 도시락을 먹으며 농담을 주고받자 ‘소풍 나오셨냐’며 쏘아붙이고 가는 순남. 그런 순남이 아파트가 떠나가라 통곡하면 저 지긋지긋한 울음 때문에 대입에서 삼수했다며 방문을 박차고 나가는 옆집 소녀.


‘나라도 저런 상황이라면 짜증이 나겠다’는 바로 그 장면들을 통해 관객은 순결한 관찰자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윤리적 고민들과 마주하게 된다. 간편한 결론을 내지 않는 고민들이 영화 내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생일>은 사회적 갈등을 다룬 한국영화의 윤리적 레퍼런스로도 훌륭하지만, ‘순결한 피해자는 없다’보다 한발 나아가 ‘순결한 관찰자도 없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 콘텐츠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생일 #이종언 #설경구 #전도연 #세월호

keyword
고요한 영화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디터 프로필
구독자 277
매거진의 이전글알폰소 쿠아론과 다르덴 형제 중 누가 더 낫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