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넷플릭스‘더 글로리’로 온통 떠들썩하다. 전 세계 OTT 순위 일 등은 당연지사. 무자비한 학교폭력을 당한 주인공이 가해자를 처단한다. ‘재벌 집 막내아들’에 이어 복수극이 대중의 관심을 또 받고 있다. 사람들은 복수를 좋아한다. 억울한 주인공에게 혼쭐이 나는 가해자를 보며 시청자는 자기만의 가해자를 대입하고,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현실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드라마의 마법. 대리만족도 드라마의 묘미다.
녀(女) 주인공 시대
‘복수극’은 남성의 서사지만, 더 글로리는 남성 차별적이다. 먼저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반갑지만, 솔로 홈런은 아니다. 요새 인기를 끄는 드라마 중 여성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편이 많다. 추세인가. 로맨스물은 되어야 여성이 주인공 맡는 편인데, 최근 사극부터 전문직이 등장하는 드라마까지 여자들이 이야기를 주도한다. 사실 전문직 드라마에서 여성 주인공이 종종 등장했다. 왜냐 ‘전문직’ 로맨스물이니까. 의학 드라마는 의사가 연애하는 의료 로맨스. 법률 드라마는 변호사끼리 사랑에 빠지는 법정 로맨스. 전문직 여성이 주인공이어도 드라마가 로맨스물이기 때문에 여성상은 한정적이었다. 전문직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은 곁다리, 사랑에 갈팡질팡하는 감성적인 모습이 주다. 이는 감정은 여성의 영역이라는 소위 전통적 여성성을 전문직이라는 직업으로 변주해서 보여줄 뿐이다.
경향은 바뀌었다. 여주인공은 이제 사랑에 관심 없다. 자아실현을 위해 고군분투할 뿐. 인기드라마 ‘대행사’에서는 광고 제작자인 여주인공이 어딜 감히 ‘여자’가, ‘이 바닥에서 여자는 안돼’를 랩처럼 읊어대는 고위급 남성들을 오로지 실력으로 까부수고 권력의 끝까지 오르며 성공한다. 심지어 영웅의 활약상이나 전쟁을 주로 다루는 사극에서도 왕이 아닌 왕비가 주인공을 맡아 인기를 끈 작품 ‘슈룹’도 있었다.
사진출처: 넷플렉스‘더 글로리’ 여주인공 동은도 기존 여성 캐릭터를 탈피한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십수 년을 치밀하게 계획해 복수를 이행한다.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동은의 복수를 위해 자진해서 조력자가 된다. ‘더 글로리’의 인기로 여자 주인공의 가치는 복수극에서조차 입증되었다. 확실히 추세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영화 평론가 황진미는 친(親) 여성적 추세에 대해 ‘드라마 업계가 남성 중심성을 벗고 진보적으로 되었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親) 자본적으로 시청률이 잘 나오기 때문에 ‘남자들이 하던 이야기를 여자들이 대신한다.’라고 말한다. 내용은 같아도 주인공이 여자면 이야기는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그의 의견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인기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주인공뿐 아니라 여성 등장인물이 많이 나온다.
그동안 여성 캐릭터는 가뭄에 콩 나듯 귀했다. 전쟁이나 조폭, 검사물이나 수사물에서 여성 캐릭터는 단발적 피해자이거나 주로 남자주인공과 관계 속에 등장한다. 흔히 사적인 관계다. 엄마나 남매, 부인이나 애인 정도. 가끔 직장 동료로도 나오지만, 단독으로 서사를 이끌어 갈 정도의 분량은 되지 않는다. 내용 측면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로 극을 이끌기보다 남자주인공이 하는 일을 도와주거나 방해한다. 이에 주체적이기보다 의존적이며 입체적이기보다는 단편적이다.
여성 캐릭터의 반란(叛亂)
‘더 글로리’ 등장인물은 다르다. 여주를 도와주는 조력자도 괴롭히는 주된 가해자도 모두 여자다. 가족관계에서조차 주연급 어머니가 등장인물의 현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심지어 입체적이다. 주인공은 드라마 속 어느 남성 캐릭터보다 속칭 남성성을 뽐낸다. 동은은 모든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계획하여 치밀하게 복수를 이행한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박연진은 대놓고 착한 여자 컴플렉스를 벗어버린다. 사랑받고 싶은 남성에게 조차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린다. 설상 쌍시옷이 들어간 욕지거리라 할지라도. 여성성에 위배된다고 여겨져 왔던 담배까지 ‘꼬나물면서’.
사진출처: 넷플렉스 여주 조력자 강현남은 피해자 캐릭터의 진일보를 보여준다. “난 매는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 이 현남의 대사를 보자. 이는 수동적이고 힘없는 기존 피해자 캐릭터와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준다. 악소리도 못 내고 면상을 난타당할 때조차 때리는 남편의 두 눈을 보며 현남은 분명히 말한다.
“당신이 아무리 날 망가뜨려도 난 이제… 당신 무섭지 않아. 나… 빨간 립스틱 바를 거야.가죽 잠바도 입을 거야. 그리고 아주 먼 나라의 도로를 끝도 없이 달릴 거야”.
이로써 폭력으로 인간 현남을 말살하려는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인간 존엄성을 지킨다.
폭력의 본래 목적은 인간성 말살이다. 천부인권(天賦人權), 인간이면 마땅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하는 자율성을 가진다. 남편은 현남을 때려눕혀 그녀의 인간성, ‘자기 의지’을 삭제하려 했다. 현남을 본인 마음대로 하기 위해. 현남의 몸은 멍들어도 마음은 맞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 움직인다. 적극적으로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주체적으로 가해자인 그를 처벌할 계획까지 세운다. 바로 이 강현남이 ‘더 글로리’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이다. 피해자는 영원히 피해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녀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변태(變態)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더 글로리’ 엄마 캐릭터도 기존 어머니상에서 벗어난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모성 신화를 철저히 깨부순다. 이들은 자식을 위해 뭐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을 위해 자식을 희생한다. 효(孝) 사상은 서구에는 없지만, 모성은 전 인류적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 어려운 것을 더 글로리는 해낸다.
사진 출처: 넷플렉스 동은 엄마는 어릴 적 동은에게 아동학대를 자행한다. 성인이 되어 교사가 된 동은을 팔아 학부모들에게 촌지를 받아낸다. 제대로 키우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식의 앞길까지 망친다.
연진 엄마는 연진의 악행을 돈으로 무마해 자식을 보호하는 듯하지만, 자신이 감옥에 갈 상황이 되자 딸을 대신 보내려 한다. 딸이 재벌 집으로 시집가고 TV에 나오는 성공한 인생 살 때만 보호해 준다. 남에게 자랑하기 좋은 자식은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단일 뿐. 한 인간으로 연진이가 어떤 삶을 사는지는 관심 없다. 딸 연진의 잘못은 엄마의 잘못이다. 연좌제라는 게 아니다. 자식을 똑바로 가르치지 않은 게 잘못이다. 특히 연진의 삐뚤어진 도덕성을 바로잡지 않았다. 어릴 때 한 번이라도 연진이에게 친구를 괴롭히는 행동이 왜 나쁜지를 알려줬다면 딸의 인생은 보다 인간다워졌을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니까. 수치(羞恥)를 느끼는 것도 인간뿐이기에.
여기에 동은 이에게 알게 모르게 힘이 돼주는 현명하고 의리 있는 여성 노인 캐릭터 손숙이나 동은 이의 아픔을 보듬고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보건교사 등 ‘더 글로리’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통해 다채로운 여성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드라마는 허구이지만 여느 문학작품처럼 여성의 진실(眞實)된 이야기를 담아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