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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승 Apr 26. 2023

나르시스트 염미정, 해방 될 수 있을까?

나의 해방 일지. 제목부터 맘에 든다. 해방(解放)은 속박된 것을 자유롭게 하는 걸 뜻한다. ‘나는 이제 해방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보자. 미친X 가 저 멀리서 들려올수 도 있겠지만, 잠시동안은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 들 것이다. 그렇게 해방. 어느 것에도 하나 구속받지 않는 상태 해방, 은 참 좋다. 인간은 늘 구속 받고 살기에. 개인은 항상 민족, 계급, 종교, 인종, 성별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조건들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앵글로 색슨 백인을 만나면 혹시나 날 동양인으로 업신여기지 받지 않을까 주눅이 든다(경험상 언어의 문제가 인종차별주의를 능가함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늘 극복될 수 있는 후천적 문제로 둔갑한다). 람보르기니나 롤스로이스니 값비싼 차가 미천한 내 차 옆에 주차라도 할라치면, 혹시나 긁을까 부리나케 도망치기 바쁘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나를 규정짓는 계급적 범주가 찰머거리처럼 따라다닌다. 징그럽다. 다 벗어버리고 싶다. 어떤 속박도 받지 않는 존재. 스스로 그런 인간으로 해방되고 싶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떡하니 드라마 제목부터 해방이라니, 기대가 되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일단 ‘나의’ 해방일지니, 나로부터의 해방은 아닐 것이다. 그럼 무슨 속박을 벗어버리고 해방되려는 것일까? 나의 ‘어떤’ 해방을 이야기할지 궁금했다.


염미정은 회사 내 소모임 해방클럽을 만들어서 자신이 얽매여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뚫고 나아가는 해방을 이루려 한다. 겹겹이 몰아치는 사람들 틈에서도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미정이는 홀로 존재함의 지긋지긋을 견디려 상상 속의 타자를 만들어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긴 긴 시간 이렇게 보내다간 말라죽을 것 같아서 당신을 생각해 낸 거에요. 언젠가를 만나게 될 당신. 적어도 당신한테 난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겠죠.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고, 만나지도 않은 당신. 당신. 누구일까요.     
당신과 함께 여기 앉아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이런 그지같은 일도 아름다운 일이 돼요. 견딜만한 일이 돼요. 연기하는 거에요. 사랑받는 여자인 척,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척. 난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지지를 받고, 그래서 편안한 상태라고 상상하고 싶어요. 난 벌써 당신과 행복한 그 시간을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당신 없이 있던 시간에 힘들었던 것보다 당신을 생각하면서 힘을 냈다는 게 더 기특하지 않나요?     


카페에서도 미정이는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 자신을 달래려 한 인물을 만들어내고, 상상 속에서 사랑받는 여자가 된다. 상상은 오랫동안 지녀왔던 무의식의 영역이 의식화되는 것이다. 상상만 하면 이루어지리라. 무의식적 바람을 실현코자 하는 강한 열망(lust)에 의해. 일상 속에서 천천히 발현되는 욕망과 달리 열망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폭발된다.


미정의 열망은 타자로부터 ‘사랑받는 여자’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 되고 싶으니까 상상 속에서라도 이루려고 했다. 상상 속에서 자신은 사랑으로 채워진 모든 게 갖춰진 완벽한 여자가 됨으로써 스스로 ‘받는’ 존재로 격상된다. 미정은 구 씨가 자신을 추앙하게 해 상상 속 남성을 현실화시킨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사랑받는 완전한 여자로 거듭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제2의 성에서 여성의 타자적 위치성을 설파한 시몬느 보브아르는 여성에게 사랑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라고 했다.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서 사랑받기 위해서. 즉 그 남성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남성 속에 자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사랑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성은 나를 사랑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사랑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미정이 구 씨를 추앙하는 것은 그로부터 추앙받기 위해서다. 구 씨의 눈을 통해서 미정은 자기 자신이 사랑받을 만 존재라고 여긴다. 자신을 사랑하는 구 씨의 마음을 이용해 자신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구 씨에 대한 추앙은 자신에 대한 추앙이다. 그 타자에게 특별한 사람이 됨으로써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 타자가 미정이의 추앙에는 절대적이다.      


열망을 담아 상상해 본다. 아 혹시 나의 해방일지에서의 그 해방이 남의 시선을 통해 나를 보는,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맥락 지어진 나를 해방하는 그 해방인지 말이다. 구 씨와 열렬히 추앙관계에 있는 미정이는 타자(구씨)없이 사랑받지 않고도 채워진 완전한 자기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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