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비혼자의 날은 없냐고요?
부부의 날 혼자 꽃을 달다
‘지 이이이 잉... 지 이 이이이 잉...’
아! 일요일이라고! 좀 쉬자. 날 내버려 둬! 제발....
일요일이라 방구석 난민생활을 좀 즐기려는 참이었다. 재미있다고 주변에서 노래를 불러 드디어 일요일이라 틀어놓은 넷플렉스. 여름처럼 더워진 날씨를 날려줄 얼음 동동 띄워낸 시원한 냉커피, 유행에 뒤처질세라 며칠 전 인터넷에서까지 주문한 쫀득하고 달짝지근한 약과까눌레. 자, 이제 주말 플렉스 삼박자가 모두 갖춰졌다. 이 여유를 즐기며 시원하게 첫 모금을 마시려는 찰나에 웬 문자!! 그것도 여러 번 울리니 짜증이 났다. 발신인을 추적해서 혼을 낼 모양으로 입술을 씰룩이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덥석 쥐었다.
네 이놈! 황금 같은 일요일 오후에 왜 문자질이야! 하며 애먼 발신자를 구박하려는데.. 어라?! 알람이네... 이거 뭐 셀프 꿀밤이라도 날려야 하나. 탄식 섞인 한숨이 나왔다.
잊지 말고 수선 맡긴 가방을 찾아오라는 이 주 전 예약한 알람이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친한 사촌동생 결혼식에 갈 때 너무 읎어 보일까 봐 수선이라도 해서 그 가방을 들고 갈 요량이었다. 내가 가진 것 중 유일한 명품. 오 마이 프레셔스. Gucci라고 크게 쓰여있어서 ‘안 사본 사람이 명품 사면 꼭 그렇게 로고 크게 박힌 걸 사더라.. 촌스럽게..’ 하며 친구들 아니 회사동기 여자사람들이 놀려댔지만, ‘크게 써있지 않으면 나도 그게 구찌인지 모를까 봐 큰 걸 샀다 이년들아!’라고 마음속으로만 쿨하게 응수해 줬다.
수선집은 걸어서 십여분 거리에 있었다. 가는 길에 백화점과 상점들이 즐비한 번화가를 통과해서 가야 했으므로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갔다 와서 먹으면 되잖아. 미련 떨며 지척대는 발걸음을 재촉해 바삐 거리로 나선다. 일요일이나 그런지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백화점 앞신호등에서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는데,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사람들이 우후죽순 지나간다. 뭐지? 스승의 날은 지났는데? 부처님 오신 날인가?! 이 바보야! 붓다는 연꽃이지! 그럼 뭐지?! 퀘스천 마크는 점점 커져 머릿속을 다 채운다.
뚜뚜뚜뚜.... 파란불이 켜졌습니다. 신호등 소리도 무색하게 꽃을 달아주는 천막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심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다는 걸 봐서는 공짜일께 뻔해! 나도 하나 달아야지! 하는 마음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앞이 뻥 뚫린 오픈된 천막에서는 한쪽 부스에서 사람들이 카네이션을 나눠주고 있었다. 나도 냉큼 줄을 섰다. 긴 줄도 아닌데 궁금해서 그런지 일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내 차례가 다가오자, 연습을 한다. 평소 사회성이 떨어지는 스타일이기에 미리 할 말을 연습해 놓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는 어버버버.. 하면서 말 못 하고 뒤돌아서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거 왜 주는 건가요?’ 아 이건 시비조잖아. 받는 사람이니까 나이스하게 물어보자.
‘오늘 무슨 행사 있나요?’ 그래 이게 좋겠어. 뭔가 사심이 없어 보이잖아.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꽃을 달아 줄줄 알고 오른손으로 재킷 호주머니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혼자 오셨나 봐요?”
으잉? 왜 물어보지? 내용보다 왜 묻는지 이유가 궁금한 질문이었다.
“네?”
혼자 오면 안 되나요?라는 말은 목구멍 깊숙한 곳에 묻혀졌다.
“아.. 오늘 부부의 날 행사라 부부들께만 꽃을 드리고 있어서요..”
“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에 꼬리란 꼬리, 눈꼬리니 입꼬리니는 다 쳐 있을게 뻔했다. 애써 괜찮은 척하려고 미소를 짓는다. 아 이럴 때 짓는 미소는 보통 눈은 안 웃고 입술은 일그러진 썩소가 되는데... 걱정되는 마음으로 입꼬리를 서서히 올린다.
“이것 때문에 일부러 나오신 건 아니죠?”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훈남인 스태프가 분홍 카네이션 한송이를 내 앞으로 가만히 놓아둔다.
“아.. 아... 니에... 요....”
떨리지만 밝은 목소리였다. 혼자이지만 꽃은 받았기에, 내 목적은 달성했으므로 기쁨이 어느 정도 묻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카네이션을 낚아채듯 손에 쥐고 꾸벅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자리를 떠난다. 아니긴. 아니라면서 그건 왜 챙겨. 어여쁜 분홍색 꽃을 보고 있노라니 다소 뻔뻔한 내 부끄러움이 사그라지는 듯했다.
이제 내 의문이 풀렸다. 부부의 날이라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서로서로 받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 주었던 거다. 혼자인 나만 멋쩍게 손에 들고 있는 것이고. 아니 근데 뭔가 이해가 안 된다. 원래 무슨무슨 날은 역사적·사회적 약자의 권익증진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 아닌가. 얼마 전 어린이날도, 하도 어린아이들이 교육도 받지 못하고 그저 나이 어린 코흘리개쯤으로 여겨지니까, 이들을 위한 사회적 인식을 키우기 위해서 날을 지정한 것이다.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이날 지정 이후, 의무 교육도 생기고 ‘어린이’라는 아이들을 위한 사회적 언어도 등장했다. 장애인의 날, 여성의 날 도 마찬가지다.
부부의 날은 뭐지? 삼겹살데이나 빼빼로 데이처럼 상업적으로 만든 거 아냐? 하며 검색을 해보니 부부의 날: 대한민국의 국가공인 법정기념일이자 부부간의 관계를 되새기고 화합을 독려하는 취지에서 만든 기념일. 어린이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이렇게 남녀가 자라서 부부인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뜻으로 제정된 것이라고 한다(위키백과).
아니 결혼을 안 한, 아니 못한? 나는 그럼 어른이 되지 못한 건가? 결혼을 해서 가족을 꾸려야 어른? 아니 일인 가구는 가족 아닌가요?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사는 공동체는 가족 아닌가요? 어차피 결혼도 기본은 비혈연적 만남인데. 갖가지 생각들이 머리에 스치면서 왜 비혼자, 미혼자의 날은 안 만들어 주는지 뿔이 났다. 아. 이참에 내가 만들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