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근원(根源), 그들의 연애

2편: 예고된 첫 만남

by 이승민

1976년 애비에미의 첫 만남은 전라도 시골동네가 아닌, 서울이었다. 70년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이주의 물결이 정점을 찍은 시대였다. 60년대만 해도 244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70년 543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전쟁 후 빈궁(貧窮)의 시대에 그래도 살만한 기회의 땅은 서울이었기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쟁의 폐허를 막 지나온 에미애비의 가족들도 싵날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으려 서울로 향했다.


모두의 마음속엔 서울드림이 뭉게뭉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림을 제법 잘 그린다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지만 손에는 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시골 종갓집, 그것도 장손의 첫째 딸 에미도 다르지 않았다. ‘장녀라고 동생들만 돌보라는 법이 있간디, 중핵교도 마치고 고등핵교까지 다녀야지’. 서울에 올라오던 그해 열네 살이었던 에미는 야무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서울에 오면 학교를 보내주겠다는 외할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학교를 다니고픈 애미의 소망은 이루어졌지만, 반은 일그러진 꿈으로 남았다. 공부를 가르쳐주는 곳인 줄 알고 간 핵교는 간호전문학교 었고, 그것도 저녁부터 밤까지 수업을 하는 야간이었다. 종갓집 대식구가 서울로 이주를 온 탓에 한 끼에 밥상에 놓아야 할 밥그릇만 십 여개. 이 살림을 큰 며느리로 도맡아 했던 외할머니는 먹고 치우기만 해도 온종일 서서 땀을 흘려야 했다. 자식들까지 돌볼 여유가 없자 동생들을 돌보는 건 큰딸 에미의 몫이 되었다. 낮에는 집안 일로 바쁘니, 밤에 다닐 수 있는 야간학교가 그나마 절충안이었다.


그림 그리는 손에 칼과 가위가 쥐어졌지만 워낙 손끝이 야무진 턱에 단숨에 학교를 월반해 수술방 간호사가 되어버린다. 별이 뜨면 병원에 가고 별이 지면 집에 돌아와 동생들 도시락을 쌌다. 막중한 K장녀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어엿한 숙녀가 되어가는 지도 몰랐다. 일하던 닥터들에게 연시를 받을 때만 장녀에서 여인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고된 현실은 설렘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스물네 살만 넘어도 노처녀 소리를 듣던 당시, 에미는 스물둘. 혼기가 꽉 찬 나이었다. 그걸 부모도 모르진 않았을 터, 덜컥 에미도 모르게 약혼날짜를 잡아버린다.


아침 댓바람부터 어딜 급히 가려는지 에미의 아부지는 신발도 꺾어 신은채 대문을 열며 에미를 불렀다.


“일루온나”

“눼에. 아부지.”

“다음 달에 약혼인 거 알간디?”

“뉘기요?”

“뉘기긴 뉘기여. 너지. 여기 또 누구 있매?

“.....”

“째진 주뎅이로 어찌 말이 없냐?”

“네.”


평소 불같은 성질을 알기에 불호령을 피하려 에미는 일단 큰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당황. 놀람. 혼란의 삼중주가 ‘워매매. 워쩐당가.. 워쩌크롬...’ 가사에 맞춰 놀라운 속도로 연주되고 있었다. 장손인 외할아버지의 막강한 가부장 권력하에 자라온 에미는 속된 말로 뼛속까지 유교 걸이었다. 아부지 말씀이니 하늘이 두쪽 나도 따라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별안간 약혼이라니 고개가 절로 좌우로 돌아간다. 그야말로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에게 얼싸 안기게 생긴 것. 외할아버지가 꽁무니를 내뺀 텅 빈 마당, 에미는 하루종일 왔다리 갔다리 잰걸음을 쳤다. 정신 사나운 속마음이 재채기처럼 연신 튀어나오고 있었다.


언제 주고 밥을 안 줬는지 마당 앞 누렁이의 양은 밥그릇에 별이 반짝하고 비춘다. 그제야 집에 돌아온 에미의 아부지는 딸년 속이 새카맣게 타버린지도 모르고, 평상 위에 그대로 고꾸라 져버린다. 평소 같으면 진동하는 술냄새에 피해버리고 말지만, 궁금증은 후각마저 마비시켰다. 슬쩍 평상 모퉁이에 엉치를 밀어 넣고 애미는 조용히 말을 꺼낸다.


“아부지, 신랑이 뉘긴디요?”

“있다.”

“앗다 그라지 말고.. 좀..”

“조선 천지에 딸 줄 디가 없어서 거렁뱅이헌티 줄까?”

“쬐금만이라도..”

“염빙하네. 아부지가 말허는디 어디 토를 자꾸 달아. 소갈머리가 쥐창아리만 해 갖고, 저게 어디서 배워 묵은 짓이냐!”


대화를 버럭으로 끝낸 그는 씩씩거리며 일어나 마당 앞 수돗가에 간다. 화가 나 발갛게 된 얼굴에 호스를 갖다 대니 콸콸콸 물이 쏟아진다. 애미는 바랬다. 성난 마음도 같이 씻겨 내려갔으면 좋겠다고. 더는 아부지에게 입을 댔다가는 뭐가 날아올지 몰라 애미는 애꿎게 가슴만 자꾸 쓸어내렸다. 이 답답한 마음이 풀길이 있을 성싶어 약혼자에 대해 외할머니에게 묻는다.


“어무이는 쪼메 뭐 아능가? 알면 야그해 보더라고”

“나가 어찌 안당가. 바깥양반이 하는 일인디. 괜스레 아부지 성나게 하지 말고”


말을 끝내는 입매무새가 앙 다물어진다. 더 이상 입 떼지 말라는 일차 경고다. 옐로우 카드를 무시하면 날라오는 등짝 스매싱을 견뎌야 하나, 일생일대의 중차대한 결혼인데 어찌 그깟 게 아픔이겠는가. 까짓 거 애미는 용기를 내 다시 묻는다.


“그래도 뭐 들은 거 있을 거 아니메?”

“워째 빙신 팔푼일까 벼? 알려고 하지마러. 아부지가 다 니 좋으라고 하는 일잉께”.


그렇게 믿는다면 그 말이 참말이겠만, 믿어지지 않는 걸 믿을 수는 없었다. 지난한 입씨름에 단념한 에미에게는 이제 단 하나의 선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직접 보는 수밖에.



3편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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