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문해력 그 사이
나는 퇴폐문학이 좋다.
외설스러운 내용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남들에게 말하기 어려운 개인의 정서적 아픔이나 혼란을 이야기하는 문학이 좋다는 말이다. 나는 꽤나 어린 시절부터 이런 내용의 글을 좋아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내 심장을 쏴라’, ‘비행운’등 문학 무지렁이인 나의 마음을 끄는 책들은 하나 같이 아픔과 혼란을 이야기하는 것 들이었다. 이 시절 누군가가 내 책 취향을 물으면 “나는 한국현대소설 그중에서도 어두운 내용의 책을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30대인 현재의 나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인간실격’, ‘사양’, ‘날개’ 등의 책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깊은 감명을 넘어 공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의 나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국 현대 소설이 아니면 공감은커녕 주변인물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던 안쓰러운 문해력에서 ‘좋은 솜씨로 번역’된 해외 명작은 어렴풋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문해력이 되었다는 점뿐이다. 그리고 내 책 취향을 묻는 질문의 대답은 “데카당스 문학을 좋아합니다”로 바뀌었다.
나는 왜 달콤 쌉싸름한 사랑 따위나 늘 내 옆에 웅크리고 있는 소중한 행복 따위를 이야기하는 책에는 공감을 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으레 사춘기의 아이들이 그렇듯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비극에 내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추며 본질 없는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걸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픔과 혼란은 자극적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부정적인 표현은 하지 않는 게 덕목이며, 긍정적인 표현은 많이 하는 게 덕목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만 봐도 현대사회가 부정과 긍정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시대적 풍토에서 직장인인 나는 부정적인 표현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적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정서적 아픔이나 혼란을 이야기하는 퇴폐문학이 나에게는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가장 진실된 진리이며 가장 자극적인 문학이 아니었을까.
최근에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책을 읽었다. 김영하 작가의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전달력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중에 하나이다. 게다가 제목이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니 내가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물론 문체도 내용도 흠잡을 데 없이 너무 좋았고, 실제로 책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한 호흡에 빨려 들어가듯 몰입해서 읽었다. 하지만 나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맹숭맹숭한 감정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흥미로운 줄거리와 기술력 있는 전개에 감탄했고 내용도 내가 좋아할 법한 내용의 그것이었다. 분명 ‘내 취향’의 책 임이 틀림없는데 나는 조금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내 취향’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내가 취향이라고 말하는 범위는 사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나의 문해력의 한계를 말하는 건 아닐까? 누군가 지금 내 책 취향을 묻는다면 “나는 퇴폐문학이 좋습니다”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내 취향은 어느 곳에 가있을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