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살면 나도 모르게
불효자가 된다
태어나서 처음 아빠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사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본 언니는 늘 남들을 넘치게 걱정하고 배려하는 사람인데 아버지 장례식 치르러 한국 다녀오고 나서, 언니가 낯설게 느껴졌어요.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는 언니가 살짝 불편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던 게 아닌데. 가족과 함께 뒹굴거리며 남편과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도착한 문자. '언니 불금인데 우리 집에서 치맥 할래요?'. 사랑에 빠진 십 대 소녀처럼, 어린 딸과 남편을 제쳐두고 룰루랄라 도착한 친구 집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몇 달 전 돌아가신 아빠의 얘기가 나왔다. 생각하지도 못한 주제여서 당황했고 당시 그 친구가 나에게 주었던 손 편지가 참 따뜻해서 이렇게도 사람을 위로할 수 있구나 생각했던 기억도 동시에 떠올랐다. 나는 충분히 위로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나는 이 이야기를 왜 시작했나.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팔 할은 엄마로부터 비롯되었다. 유년시절부터 정립된 나의 가치관부터 어린 시절 눈물 나게 행복했던 추억들, 중고등학교 시절의 방황기, 나의 첫사랑, 그리고 마지막 엄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호스피스 병원에서 함께 먹고 자고 한 순간까지 내 인생 그 모든 순간에 엄마가 있었다. 엄마가 암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는 중이었음에도 결혼하고 하와이에 신혼생활을 시작한 것은 엄마의 강한 바람(그렇게 떨어져 살더라도 너는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때문이었다. 눈 감기 전에 큰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엄마. 하지만 아빠와 나 사이는 달랐다. 오가며 가벼운 안부 인사를 하는 이웃사촌, 반에서 가끔 쉬는 시간에 매점을 같이 가는 친구 정도?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하려 할 때 아빠와 의논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겉으로 보기에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니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적당히 수다 떠는, 잘 모르는 이웃이 보면 사이좋은 부녀라고 착각할 정도의 적당한 사이. 하지만 친구의 말을 듣는 그 순간에는 좀 아찔했다. 내가 그랬던가? 정말 아빠의 죽음에 아무렇지 않았나. 나는 슬프지 않았던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죽기 전 납골당을 알아보고 자기가 입을 수의를 주문하던 엄마, 병실에서도 꽃꽂이를 했고 성당의 어르신들을 호스피스 병동 한편 회의실로 모셔 식사 대접을 하기도 했던 엄마(원장 수녀님의 배려로 가능했다). 엄마는 부랴부랴 해외에서 온 사위까지 모두 참석한 가운데 임종을 치렀다. 그런 순간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도 엄마처럼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는 엄마와 정 반대였다. 두 딸이 우겨도 절대 안 통하는 그 고집으로 동네 별 세 개 정도 수준의 요양 병원에 스스로 입원했다.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개인 병실도 마다했고, 제 각각 사연이 있어 보이는 환자들로 채워진 곳이었다. 건조한 공기와 고요 속에서 아빠를 찾는 이들도 친구 몇 명과 가족뿐. 호스피스 병동에서 서서히 마지막을 받아들인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죽는 순간이 두렵고 무섭다고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내가 후회할까 봐 무리해서 한국을 찾아 아빠와 병실에서 일주일을 함께 보냈다. 식사가 힘든 아빠에게 풍선껌을 사다 주고, 식혜로 입술을 축여보라고 권하고, 시력이 안 좋아져 책도 못 읽는다는 아빠에게 컬투쇼 레전드 사연을 들려주는 일을 했다. 카페에서 수다 떨 던 것처럼 농담도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진지해져 끝까지 동생을 잘 보살피라는 당부도 남겼다.
엄마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면서 나는 늘 혼자서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부녀 관계는 그저 그랬어도 부부 관계는 엄청 좋았다) 아빠가 안쓰러웠다. 아빠가 지인들을 만나는 횟수는 점점 줄었고(친구 없으면 못 사는 성격은 아니었어도 몇 개의 소소한 친목 모임은 있었다), 방 안에서 혼자 컴퓨터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와이에서 아빠의 어둡고 침침한 일상생활을 동생으로부터 전해 듣는 날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빠에게 전화를 드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늘 똑같은 대화, 변함없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아빠에게 행복은 무얼까, 아빠는 무엇을 하면 즐거울까 고민하고는 했었다. 취미도 없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는 성당에도 나가지 않았다. 여자 친구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아빠에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외출하는 날이라고는 큰 고모댁에 놀러 가는 일뿐. 그렇게 엄마가 돌아가신 지 몇 년 뒤 아빠는 담낭암으로 수술을 받았고, 점점 몸 상태는 안 좋아졌다. 돌아가시기 5개월 전, 아빠 생일에 맞춰 온 가족이 제주도에 간 것이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지금도 아빠에 대해 나의 감정을 기록하는 일은 좀 어렵다. 아빠를 떠나보낸 지 몇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빠도 겁냈던 아빠의 마지막. 친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던 아버지 장례식 후 나의 모습.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몇 주, 아니 몇 달은 집 밖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까. 당분간은 모든 것을 관두고 나만의 동굴 속에 살았어야 했을까. 항상 주머니에 휴지를 넣고 다니다 틈만 나면 눈물을 훔쳐야 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에서 장례식 장면이 나오면 나는 엄마보다도 안쓰러운 아빠 생각이 더 먼저 난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웅을 받는 엄마의 삶이 더 좋아 보였는데, 조용히 주변 사람들에게 잊히길 원했던 아빠의 마지막도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가족 중에서 아빠에 대해 그리움을 가장 많이 꺼내 놓는 사람은 여덟 살, 내 조카 지유다. 지유가 할아버지 얘기를 꺼낼 때마다 동생과 나에게는 무뚝뚝했던 아빠가 손녀에게는 무척 사랑받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기회가 날 때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아빠에 대한 추억을 기록하는 것이 내가 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는. 어쩌면 아직도 아빠를 보내지 못해서 그 슬픔을 내 안에 켜켜이 쌓아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아빠의 기일이었다. 해외에 사는 자식은 제사도 못 지낸다. 부모가 살아계시면 전화라도 하는데, 부모가 돌아가시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이미 결혼해서 해외에 사는 것 자체가 불효였던 것을 한참 뒤에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