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광머리 앤 Jun 14. 2019

딸과의 여행

우리 딸이 장렬히 수능을 망치고

(담임선생님이 이렇게 평소와 다르게 시험을 못 친 아이는 첨봤다고)

한국에서 속상하며 있느니 여행이나 하자 그러면서 떠났습니다

2주가 넘어가니 지치네요

젊었을 때는 유럽 전도 한 장 가지고 한달가까이 돌아댕겼는데

나이가 오십이 넘으니ㅠㅠ


띨과 여행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들이 아들과 목욕탕 가기가 로망이라면

엄마들은 딸과 여행하는게 로망이라죠

(저는 그랬어요. 딸이랑 여행하면 좋겠다 혼자도 하고 친구들과도 하고 남편과는

하고 싶지 않고 아들과도 여행했고 모르는 아짐들이랑도 여행했으나

딸이 성인이 되어 여행을 같이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기는 개뿔

굶어죽게 생겼어요.


이 딸은 아비를 닮아 배가 고프지 않은 체질을 가졌어요

밤열시가까이 ㅊ 먹지 않고 들어와서 밥달라고 하는 그녀의 아비

밥때가 되면 난 배고파 죽겠는데 그래서 식당가자고 애원하는데

눈도 깜짝 안하고 중앙차선에서 절대 차선을 안 바꾸는 그녀의 부친


그러면서 살도 안 쪄서 올해 60인데 머리숱 많고 배도 안나와서

세월을 혼자 비껴갔나? 그 세월 모진 풍파를 나만 맞게 했나 

더 분노를 자아내는 그 녀의 파더


그래서 지금도 바르셀로나 숙소 한 구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씁니다.


초2까지 떠먹여야 저작을 하던 그녀

저작은 해도 삼키지는 않아서 열불나게 하던 그녀가

커서는 여행하며 배고프지 않답니다.


어제 사둔 포카차를 씹으며 

이 딸과의 여행을 회고해봅니다.


영어는 꽤 하는 걸로 아는데

절대 입을 안 엽니다

다 나만 시키고 

옆에서 빙그레 웃기만 해요

나는 엄청 기분 나쁩니다

"너 내 영어 비웃냐?"

아니랍니다.


하지만 기분은 비웃음당한 기분입니다.

그러면서 엄마도 스무살때는 수줍어서 말 못했을 거야 

그럽니다. 맞습니다. 저도 스무살때는 배고파도 

학생회관에서 밥을 못 먹었습니다 수줍어서.


그럴 때 주마등같이

그 수줍고 조용하던 나를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물어보고 

그것도 모자라 화장실에 셀폰 두고간 여인 셀폰 찾아주며 뛰어가고(익스큐즈 미를 외치며)

스페인 광장에서 커피 묻은 벤치에 앉으려던 젊은 여인에게 앉지 말라고 소리치는)

정의롭고 목청큰 중년 여인으로 바꾼 세월이 남편이 원망스럽습니다.


내가 딸의 얼굴과 몸매를 가졌으면(몸매로는 지 애비닮아 마르고 

길쭉해서 서울대 갑니다, 네 저 남편 얼굴보고 골랐습니다)

저렇게 수줍고 조용하게 안 살고 방실방실 웃으며 살텐데 


어제는 두 모녀가 식당에 들어가서

그간 물만 마시다가 떠나기 전 샹그리아를 시켜봤습니다

그거 500나눠먹고 술취해서 얼굴이 벌개지고 별이 돌아다니고

어질어질 니글니글 했어요.


세비야에선

대판 싸웠어요 식당에 앉아서

선글라스 끼고 싸우는데

딸아이가 창피하대요

그래서

뭐가 창피하냐고 저 웨이트리스 언니도 

엄마랑 싸울거다 그래서 이해할거다 그랬죠

그리고 헤어졌어요

엄마 따로 다녀! 그러고 돌아 가기에 잡으려다 말았어요

잡으면 을이 되니까.

돈 한 푼 없고

절대 길을 잃을 수가 없는 곳에서 길을 잃는 길치 주제에


세비야 성당근처에서 막 뛰어오는 그녀 

그 이후로 둘이 같이 다닙니다.

궁전 옆에서 줄서서 또 2차대전 했어요

이번엔 오십 유로 주면서 따로 다니자고 햇더니

같이 다니면 안 돼? 그럽니다.


그 이후로 엔간하면 말 잘 들어요

오늘이 마지막 여행입니다


돌아가면 재수시작해야 해요

나는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지만

아이는 부질없답니다.


저래도 

착한 아이거든요. 고등 3년내내 열심히 했고요

앞뒤 꼭꼭 막혔어도 바른 생활 아이라

다니면서 나에게 자전거길로 가지 말라고 끌어당기고 

잉글리쉬 하냐고 묻는 소매치기 비슷한 사람에게 

노 라고 하고 온게 미안하다고 반나절 이야기하는 애인데

남 위해서 살고 싶다고 하는 애인데

하느님께서 너무 고생 안시키고 원하는 대학 입학하도록

기적을 베풀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2019 청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