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동사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광머리 앤 Jun 26. 2023

접시꽃의 진화

1. 마당 한구석에 접시꽃을 심었다. 마당을 가진지 4년 만에. 재래종이 아닌 신품종으로. 겹프릴에 분홍색, 흰색, 살구색 접시꽃이라고 사진에 나와 있었다. 접시꽃을 심고 나니 다행히 며칠 비가 왔다. 잘 자라고 있나 싶어 가 봤더니 그리 자라진 않았다. 저 신품종 접시꽃에서 어떤 색깔 꽃이 나올지 궁금하다.      


2. 원래 접시꽃은 햇빛이 작렬하는 한여름, 대문 옆이나 담장에 피어있다. 마치 집을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여름장마에 다른 꽃은 휙휙 넘어지는데, 붉은 접시꽃은 꼿꼿하다. 그래서 더 무섭다. 잎도 호박잎처럼 크고 거칠다.      


3. 접시꽃은 마치 큰 키에 큼지막한 붉은 얼굴을 한 멋없는 아낙네 같다. ‘접시꽃 당신’에서 나타난 여인은 밭을 갈다가 병들었으나, 약도 제대로 못 쓰고 유명을 달리 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시로 이름을 얻었다. 죽어서까지 남편에게 뮤즈가 되어 헌신했다고나 할까? 젖은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손에 물 마를 날 없이 식구들에게 밥을 해 바치고, 동동거리며 집안일을 하는 힘 센 여인이 바로 접시꽃이다.   

   

4. 아들딸 차별하여 키우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던 어머니는 내가 나이 서른을 앞두자 시집을 가라고 성화를 했다. 노총각 아들이라면 몰라도 노처녀 딸을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수없이 선을 보고, 소개팅을 한 후 마침내 만난 남편은 접시꽃 같은 아내를 원했다. 주말부부를 하는 아내가 일터에서 먼 길을 달려 집에 오면 평일에 못 받은 밥상을 차려 바치길 바랐다.      


5. 어렸을 적 꿈이 현모양처기는 했다. 고등학교 고전문학에 나오는 거안제미, 그러니까 밥상을 눈썹에 마초어서 상을 바치고, 남편이 퇴근하는 길에 꽃을 심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아내가 되고 싶었지만, 그건 접시꽃 같은 아내와는 다른 것이었다. 사랑스러운 아내나 아름답고 우아한 현숙한 여성에 가까웠다. 그건 진정 밥풀 붙은 앞치마에 머릿수건, 밭일을 하도 해서 붉어진 얼굴을 한 접시꽃 같은 여인은 아니었다.      


6. 내가 집 안 청소를 하면, 남편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았다. 엎드려 거실을 닦다 보면 화가 치밀어 올라 걸레를 집어 던지고, 한 사람이 일하면 같이 일거리를 찾아서 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일갈했으나, 남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왜 같이 퇴근 했는데, 밥은 내가 차려야 하는가? 삼각함수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7. 한참 아이들을 키울 때는, 남녀평등을 논하며 남편과 싸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평일엔 그냥 내가 집안일을 다 했다. 아침잠이 유독 많은 내가 일요일 날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남편은 그날마저 밥을 하라고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남의 남편은 일요일 날 아이들이랑 조용히 나가 해장국을 사 먹고, 아내 먹으라고 포장까지 해다 준다는데, 내 남편은 그런 주변머리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여자가 밥을 하라고 헌법에 나와 있느냐?’고 외치며 싸웠지만, 그다음 주에도 남편은 나를 또 깨웠다.      


8. 일요일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남편, 이날만은 순순히 밥을 하지 않고 헌법을 들먹이며 싸우는 나를 피해 큰 애는 일요일마다 자진해서 혼자 교회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아빠가 싸우느라 아이들을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때 싸우지도 않았으면 나는 병들어 일찍 죽었을 것 같다. 그럼 나는 일찍 시드는 작약꽃이 되었을까?      


9. 30 년을 투쟁하다 보니 요즘은 예전처럼 남편에게 밥을 차려줄 때, 화가 나지 않는다. 심지어 남편 빨래를 개는데도 옛날처럼 그리 밉지가 않다. 밥을 내가 했으니 설거지는 네가 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싸우는 방법 외에 평화로운 방법으로 남편에게 일을 시키는 기술을 습득했다.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하는 것이다. 남편이 일을 하고 나면, 잘잘못을 평가하지 않고 칭찬한다. 내가 변했다. 마치 형질이 융합된 것처럼.      


10. 원예종으로 개발하려면 유전적인 변이를 창출하거나 염색체 재조합을 유도하기 위해 계통 간 교잡을 하거나 염색체 수를 늘리거나 줄인다고 한다. 서로 교잡이 안 되는 종속의 형질을 융합하기 위해 일부러 잡종을 만들거나 인위적 돌연변이를 유도하기도 한다. 남편과의 끝없는 밥을 둘러싼 투쟁이 나에게는 새로운 유전자 개발이었을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변형이었을까?

      

11. 재래종 접시꽃이 핀 골목 담장을 걸으며, 우리집에 아름답고 우아한 원예종 접시꽃이 피는 상상을 해 본다. 하지만 집에 가서 확인을 해 보면 아직 떡잎도 못 떼고 있다. 과연 우리 집 담장 분홍 넝쿨 장미 밑에 접시꽃이 필까? 이제 프릴이 겹겹이 달리고, 파스텔톤의 색깔을 지닌 접시꽃의 만개를 기다린다.     


12. 신이 나서 상상의 나래를 더 활짝 펴 본다. 가을이 되면 씨앗을 받아야지. 우리집 마당에도 뿌리고, 골목골목 새로운 접시꽃 씨앗을 뿌려야지. 온 동네 아름다운 접시꽃이 만발하겠지? 아, 근데 이런 개량종은 그 해만 피고, 다음 해에 싹이 잘 안 난다던데. 나더라도 원래 모습으로 난다던데. 우짜지. 

매거진의 이전글 흘러흘러 피아니스트 배진우 리사이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