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에 은중과 상연 이야기가 자꾸 올라와서 결국 보게 되었다. 넷플 드라마는 시작이 무서운데, 한 번 빠지면 최소 2박 3일은 밥도 거르고 보게 되니까 ㅋㅋ
11화까지 보았는데, 잠시 숨을 고르고 은중과 상연이 왜 이렇게 사람들한테 어필하는지, 지금까지 드라마들과 뭐가 다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첫째, 은중은 이제 사십대 초반, 흔히 말하는 ‘82년생 김지영 세대’다.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세대이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은중은 현재 사십대 초반의 미혼 여성이다.
둘째, 드라마는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다른 드라마에서는 아버지가 실직했다고만 하지만, 여기서는 IMF 때문임을 은근히 암시한다. 2002년 월드컵 장면도 그렇다. 모두가 모여 4강을 외치며 열광하는데, 상연은 홀로 고립되어 있고, 그 모습을 은중이 발견한다. 이런 장면들은 우리가 다 기억하는 사건이라서, 시청자는 ‘그때 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를 떠올리며 더 깊이 몰입한다.
셋째, 관계의 초점이 남녀 연애에 머물지 않는다. 은중이 상학과 헤어진 뒤, 사람들의 관심은 ‘그럼 상연과 사귀는 건가?’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드라마는 연애와 결혼의 결말을 쫓지 않고, 은중과 상연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정리되는지를 더 비중 있게 보여준다. 여성과 여성의 관계를 중심에 두는 드라마가 흔치 않은데, 이 작품은 그 흐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넷째, 은중이 상학과 다시 이어질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감정 문제가 아니다. 사랑을 하면서 ‘나의 나 됨’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학을 너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자기 존재를 무너뜨린다면(매일 아침 편지함을 확인하고, 친구의 일기를 훔쳐보는 식으로) 결국 버려야 한다. 이는 남성과의 사랑보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것을 택하는, 페미니즘적 선택이다.
생각해보면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연애하던 남자가 시골로 내려가는데, 주인공은 서울역에서 그를 배웅하고 돌아와 펑펑 운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겨우 남자 때문에 울어?” 하며 등을 친다. 주인공은 그 남자를 너무 좋아했지만, 결국은 자신됨을 유지할 수 있는 남편을 선택한다. 덤덤한 관계 속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많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 속에서 여성은 남자를 사랑하면서 자신됨을 버려왔다. 이야기의 중심은 늘 남녀 관계였고, 여성과 여성의 관계는 주변부에 머물렀다. 그런데 은중과 상연은 그 공식을 벗어난다. 여성의 관계를 중심에 두면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우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