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동사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광머리 앤 Jul 05. 2017

화두

대학교 일 학년 때 일이다. 아마 1학기 초였을 것이다. 하루는 학생회관 화장실에 갔다가 낙서를 발견했다. 화장실 문짝에 누군가 "나는 갇혀있다."라고 써 놓은 것이다. 아직 고등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못 벗은 나는 '대학생도 낙서를 하는구나'했다. 처음에는 짭새한테 쫓기다 여학생 화장실에 갇혀서 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로 이 말은 내가 삶에 눌릴 때마다 화두가 되었다. 


엄마의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가해지는 억압과 제재에 갇혀 있기도 했고, 세상의 규범과 규율에 갇혀있기도 했고,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모성이라는 것에 갇혀 있기도 했고, 지금은 육체에 갇혀있다. 아침마다 스트레칭을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뻐걱거리는 육체는 이제 죽는 날까지 나를 더 옥죌 것이다. 


갇혀 있다고 자각할 때마다 나는 더 자유롭고 싶었다. 누군가 내 삶에 던져준 화두. 내가 주운 화두.


교과과정이 바뀌어 거의 10년 만에 1학년 강의를 했다. 고등학생 티를 갓 벗은 학생들을 보는 건 나의 특권이다. 3월에는 호기심에 조용하다, 좀 지나면 어제 술 먹은 아이들은 티가 난다. 졸거나 잔다. 화장을 시작한 아이들(그 촌스러운 화장발이 귀엽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이들. 허나 그들의 책상에는 초콜릿 우유가 놓여있다. 어느 순간 커피로 바뀌지만 아직은 아니다. 


기말고사 문제를 내기 전에 부산에 가서 특강을 들었다. 동화작가 유은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몰락의 에티카' 서문을 읽어주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그 순간 나는 이번 기말고사 문제를 정했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나는 아이들에게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그 아이들이 줍든 말든. 


1,2,3,4번 문제를 내고 나서 시험지에,


한 학기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처음 대학에 입학한 여러분을 가르친 것을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에게 2, 3, 4학년을 가르치는 것과 달리 특별한 경험입니다. 생의 한 고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신입생들이 지니는 반짝거림, 설레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사도 그러합니다. 아이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지녔습니다.   

   

교사가 되든, 부모가 되든 한 아이에게 한 세상을 보여주는 일은 정말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세상이 특별하고 아름다워야겠지요?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은 아름답고 진실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5번의 문제를 냅니다.      


아름답고 진실하고 올바른 삶은 어떠한가? 자신의 생각을 기술하고, 이러한 삶을 자신과 아동이 영위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나라 교육은 어떻게 변해가야 할지 쓰시오.      


라고 썼다. 


기다렸던 시험지를 읽었다. 모두들 삶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짓이 없는 삶, 공평한 삶, 사랑하는 삶 모두들 아름다운 삶에 대해 다르게 정의했다. 다들 자기만의 삶을 생각하고 조망했다. 공부를 안 한 모르는 문제가 아니기에 끝까지 앉아서 썼다고 한다.


더불어 기말 리포트였던 자서전을 읽으며 또 울었다.  갓 스물을 넘은 아이들의 삶이 모든 삶은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