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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Hood Jun 14. 2021

나는 실패가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데, 정말 실패하지 않았나?

계획한 일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실패를 하게 되어서, 누군가가 내게 실망한다고 표현하는 것도 –

혹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아도 그런 눈빛을 보는 것도, 무서운 일이다.

어쩌면 스스로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것 같다.


실패하기 싫어서, 어딘가의 정답이나 성공을 끌어다 쓰다가, 오히려 넘어졌던 기억들이 있다. (=이불킥!)




초등학교 2학년 때.

‘무인도에 남을 건데 3가지를 가지고 갈 수 있다. 뭘 가지고 갈까?’

라는 질문에 반 전원이 답해보라 하는 숙제가 있었다. 다같이 적어 내고, 특이한 답은 발표를 하는 식이었다.

그 즈음 책에서 봤던 정답-이 뭐였는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2가지는 생존을 위한 도구, 1가지는 구조 신호를 비행기에 보낼 손거울 이라 했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의 ‘정답’대로 세 가지를 적어 냈고,

또래 애들은 "저거 지 얼굴 본다고 무인도까지 거울 들고간대ㅋㅋ"라는 반응을 보였다.

왜 그걸 들고 가야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걸 어디서 본 건지-에 대한 궁금증도 없었다. 그냥 내 외모와 손거울이 ‘자뻑’에 잘 매칭이 되었고, 그거면 끝이었다.

나를 나르시스트로 여기는 반응에 부끄러웠고, 이후로 정답같아 보이면서도 무난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2학년 때.

‘일기 쓰기’가 숙제였다. 간혹 ‘잘 쓴 일기’라고 선생님이 뽑은 일기는 방과후 시간에 읽어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생활 침해에 해당할 텐데.)

어느 날은, 누군가가 쓴 ‘일기를 왜 써야 하는 걸까? 일기 만든 사람 만나면 혼구녕을 내줄거임’이라는 일기가
잘 쓴 일기로 선정되었고, 창의적인 생각에 박수를 보내셨다.

그리고 며칠 뒤, 일기장에 같은 내용을 적었고, 내 일기가 칭찬받는 일은 없었다.

저 내용을 적으면 나도 칭찬받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최초를 생각해내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간신히 따라쟁이면 모를까.



남편은 2년 전 유튜브를 했고, 지금은 블로그를 한다.

그는 처음 유튜브 영상을 만들었을 때, 내게 보여주었다.

맞춤법도 틀리고 편집도 얼기설기 한 영상이었다.

굳이 찾아보지는 않을 법한 영상이라 생각하면서도, 더 만들어 보라 했다.

남편은 꽤 오래도록 영상을 만들었고, 영상을 고민할 때 활기가 넘쳤다. 내게도 영상을 만들어보라 권했지만,

내가 만들려면- 나는 디자인 툴도 영상 툴도 다룰 줄 아니까 정말 각잡고 만들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는 부끄러워, 라는 생각이 깔려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도 겨우겨우 만든 1개의 영상만 올라가 있다.)


그는 사규로 유튜브를 그만둔 후에는 블로그를 시작했고, 100개의 글을 써냈다.

그 동안 나는, 그가 선물해 준 아이패드를 들고 2개의 그림 강의를 들었고,

그가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이모티콘 제작이나, 인스타 툰이나 - 그 어느 것도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채다.



뭔가를 시작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재미있다, 쉽다.

결과물을 내지 않고, ‘취미’로만 남겨두면, 실패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면서 외고에 간 것도,

과학이 재미있으면서 점수가 더 잘 나온다는 이유로 인문계를 택한 것도,

실패하기 싫었기 때문이 크다.

나는 그만큼의 재능도, 머리도, 그를 뛰어넘을만한 끈기도 없다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림이 너무 좋아서’ '그림을 다루는 직업은 포기했지만' ‘사이드로 디자인을 함께할 수 있는’

마케터로 진로를 틀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림으로의 열정을 실패했다고 생각하기 싫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나는 실패하지 않았나? 이미 여러 번 넘어지고, 부끄러웠던 순간들이 생기지 않았나?

이미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취미로만 남겨두겠다고 접어두지 않았나?


어쩌면,

더 이상 변명도 불가하고 물러날 곳도 없어질 정도로 완벽하게 실패한 수준이 아니라

‘완벽하게 실패하지 못해서’, ‘어정쩡하게 실패하기만 해서’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니

부끄러운 순간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머릿속에 그리는 훈훈한 순간조차도 없을 것이다.


조금 더 실패해 봐도 괜찮을 거고, 아직은 더 실패해도 된다는 스스로를 향한 위로 겸 응원...을 해보며,

뭐라도 새로이 시작해보면 좋을 듯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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