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 위에서

―― 질문의 서재

by 시우


프롤로그

― 두 번째 스무 살의 기록




오래도록
질문을 잊고 살았다.
삶에 물음표 하나 던지는 일조차
사치인 마흔한 살.


책상 위에는 논문과 보고서만이 켜켜이 쌓였고
하루는 늘 마감과 회의로 흘러갔다.
나는 기계처럼 움직이며
고용된 몸 하나로 버티다
조금씩 나 자신을 태워냈다.


어느 날,
숨이 막히듯 걸음을 멈추고서야
비로소 묻는다.

학문은 왜 삶과 떨어져야 하는가.

지혜는 왜 제도의 문턱을 넘어야만
닿을 수 있는가.


내가 꿈꾸던 길은 달랐다.


권위가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대화,

성취가 아니라 오래 머무는 사유.

직함이 없어도 사유는 길을 만들고,

학위가 없어도 질문은 샘처럼 솟으며,

학술지에 실리지 않아도 글은 숨 쉬고,

생계의 무게를 벗어나

지혜와 마주할 수 있는 삶.


그 길 위에서

철학은 부엌의 냄비 곁에서 따뜻한 김이 되고,

인류학은 골목 어귀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살아나며,

문학은 발자국마다 길을 내고,

종교학은 고요히 존재의 근원을 두드린다.

그곳에서 학문은 자본의 저울 위에 오르지 않고,

사람의 걸음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


그러나 그런 길은 현실에 없었다.

생계는 여전히 무겁고,

자본 없는 말은 쉽게 힘을 잃었다.

학계는 거대한 공장이 되어

논문을 끝없이 찍어내며

속도를 기준 삼아 움직였다.

더 많은 글, 더 높은 저널,

그것만이 자리를 주고

안정을 보장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밀려난 이들은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조용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물음을 던진 바로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두 번째 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
생계의 벽 앞에 선,
나이 든 무모한 청춘.


나는 오래도록 대학에서
무모함이 곧 도전이고
방황이 곧 길이 되는
진짜 청춘들에게,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에 물음표를 던지라

가르쳐 왔다.


그러나 지금,
내 질문을 스스로 검열하는 나를
부끄럽게 바라본다.

내 선택은 도피였을까.
사랑하는 이들의 기대를 배반한 걸까.
내가 떠난 자리에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이어지는 건 아닐까.
그 물음들이 밤마다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 무게에 무너지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삶의 바탕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불안과 두려움은
스무 살의 열정만으로는
끝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무렵부터 수치와 부끄러움,
패배자와 낙오자라는 말들이
날마다 내 안에 쌓여 갔다.
쌓임은 곧 짓눌림이 되고,
짓눌림은 무너짐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무너진 끝에서야
다시 일어서는 일이
나를 살려냈다.


무너짐과 일어섬,
그 단순한 되풀이 속에서
삶은 비로소 정직해졌다.


나는 지금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다.
한쪽은 끝내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길,
다른 쪽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길.
그 앞에서 나는 오래 머뭇거린다.


두려움은 그림자처럼 내 곁을 따라오고,
침묵은 발끝에 고여
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그러나 멈춘 자리에서조차
나는 다시 묻는다.


비록 답은 더디고
때로는 부정확하며
끝내 닿지 못할지라도—
삶에 대한 물음을 놓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실패와 낙오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
내 삶의 궤적이 되고,
그 무너짐 속에서만
비로소 일어섬이 태어난다.


세상의 무게를 온몸으로 배운 지금,
나는 또다시 길 없는 길 위에 서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주저앉아 있더라도
언젠가 다시 질문 앞에 서는 일.

방향 표지판이 선명했던 닫히는 문 앞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바라보며,

바라건대,
언젠가 이 길 위에서 마주칠 누군가에게
내 불완전한 발걸음이
‘당신도 괜찮다’는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설령 마지막까지 아무도 오지 않더라도,

나의 선택이 덧없는 길로 남아
끝내 어리석음이라 불리더라도—

그럼에도

삶의 물음을 놓지 않았노라 말할 수 있기를,
그 흔들림 속에서야
비로소 내가 나였으므로.



2025년 9월 22일


지난 20여 년의 사회과학 논문과의

긴 싸움을 내려놓으며,
마지막 생계의 끈이었던 연구소를

어리석게도, 마침내 떠나며—


By 시우.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