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여는 것은 언제나 질문이었다

―― 질문이 사라진 시대를 건너는 법

by 시우

밤이 깊어질수록 연구소 건물의 불빛은

오히려 더 환해졌다.

창문마다 새어 나오는 빛은

도시에 흩어진 불면을 닮아 있었고,

그 안에서 종이 위를 긋는 펜촉의 소리,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보이지 않는 채찍질처럼

사람들을 몰아세웠다.


마감이 다가오면 공기는

종이 타는 냄새 같은 긴장으로 가득 찼다.

보고서에는 빈칸이 허락되지 않았다.

페이지마다 흔들림 없는

수치와 결론이 들어가야 했고,

모호한 문장은 지워졌다.


“결론이 뭐죠?”


그 말은 연구자의 하루를 압축하는 주문 같았다.

나는 매일 답을 낳는 기계로 살아갔다.

그러나 답을 내놓으면 내놓을수록,

내 안은 공허해졌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보고서가 쌓였지만,

그 문서들 속에서는 내 삶을 이끌어줄

어떤 물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답은 늘 손에 닿았지만,

길을 열어주는 질문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시대가 그렇다.

작은 화면 하나만 열면

폭포처럼 쏟아지는 지식이 눈앞에 펼쳐진다.

검색창에 단어를 던지면

순식간에 수천만 개의 결과가 나타나고,

AI는 몇 초 만에 수년 치 연구와 논문을 요약한다.

답은 흔하다. 넘쳐흐를 정도로 가득하다.

그런데 풍요 속에서 나는 자꾸만 목이 말랐다.

답은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정작 붙잡아야 할 질문은

갈라진 땅처럼 메말라 있었다.


질문은 늘 불편했다.

시간을 지연시키고, 확실성을 흔들며,

안전하게 다져놓은 길을 갈라놓았다.

나는 그 불편함을 오래 피하며 살아왔다.

학교는 정답을 잘 맞히는 학생을 칭찬했고,

시험은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구소의 책상 위에서 의심은 낭비였고,

망설임은 무능으로 취급됐다.

“생각해 보자”라는 말은 점점 사라지고,

“정답이 뭐냐”는 말이 내 삶의 리듬이 되었다.

AI는 이 흐름을 더 가속시켰다.

나는 점점 생각하는 주체라기보다,

답을 소비하는 존재로 변해갔다.

답은 빨라지고 정밀해지고, 치밀해졌지만

질문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의 대화법은 지식을 쌓아 올리는

기술이 아니라 무지를 드러내는 용기였다.


“너 자신을 알라.”


이 짧은 문장은 단 한 번의 답으로

닫히는 명령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어지는 질문이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질문하는 존재”라 불렀다.

그가 던진 “왜 무(無)가 아니라 존재가 있는가?”라는 물음은 끝내 풀리지 않았지만,

그 질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세계와 다시 맺을 수 있었다.

동양의 사유도 같은 길을 걸었다.

장자는 세상의 질서를 뒤집는 질문으로

인간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흔들었고,

불교는 끝내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을 붙들며

집착을 놓으려 했다.


질문은 지식을 더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깨우는 불씨였다.

그래서 철학은 답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질문을 지켜내는 예술이었다.


사회과학 역시 같은 경고를 오래전부터 보내왔다. 정보사회에서 지식사회로 넘어오면서

지식은 점점 데이터화되고 표준화되었다.

빅데이터는 경향을 드러내지만 의미를 묻지 않는다.

인간은 데이터의 해석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어버렸다. 교육학자들은 정답 중심의 교육이

창의성을 억압한다고 지적했다.

OECD 보고서는 미래 사회의 역량을

“문제를 재정의하고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라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빠른 답을 잘 고르는 인재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나는 질문을 배우지 못한 채,

답을 재빨리 고르는 기술만 연마하며 자라왔다.



나는 그 구조 안에서 오래 살아왔다.

연구소의 책상 위에서 보고서는 언제나 결론을 요구했고, 질문은 번거로움이었으며, 의심은 사치였다.

나는 매일 답을 낳는 기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책 속의 한 문장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그 문장은 아무 답도 주지 않았다.

그저 열린 채로, 내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그때 깨달았다.

답은 나를 안심시킬 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길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질문이었다.

질문은 무지에서 시작된다.


“나는 모른다.”


이 단순한 고백이야말로 사유의 가장 깊은 출발점이다. 질문은 모호함 속에서 길을 찾고,

두려움 속에서 방향을 연다.

과학은 질문에서 시작했고,

철학은 질문을 지켜내는 기술이었다.

AI는 답을 대신 줄 수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을 흔드는 물음은

AI가 대신 던져줄 수 없다.

과거의 데이터를 조합할 수는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묻는 일은 여전히 내 몫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답이 아니다.

잃어버린 질문을 회복하는 일이다.

질문은 속도의 한가운데서 자라지 않는다.


느림 속에서, 멈춤 속에서 피어난다.

숲길을 걷다가,

아이의 눈을 바라보다가,

책 한 문장을 오래 붙잡을 때

비로소 다시 돌아온다.


답을 내놓는 일에 지쳐 있을 때,

나는 나에게 조용히 물어야 한다.



이 삶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가.



2025.9.23.

By 시우.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