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의 온도를 배워가는 일에 대하여
어제 첫눈이 왔다.
그때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 내리는 가벼운 입자들이 유리창에 스치며
얼핏 얼굴을 드러낼 때,
예전의 나였다면 이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와, 첫눈이야.”
카페 앞에서, 지하철 출구에서,
우리는 약속도 없이 만나
겨울의 첫 문장을 함께 읽었었다.
그때의 눈은 사랑의 구두점 같았다.
문장을 잠시 멈추게 하고,
숨을 고르게 하고,
다음 말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작은 쉼표.
그러나 올해의 첫눈은
오늘 아침에서야 나에게 도착했다.
밤새 도시에 내려앉은 흰빛은 이미 얼어 있었고,
내가 내뱉은 첫마디는 “예쁘다”가 아니라
“괜찮을까”였다.
노인들의 발목,
등굣길 아이들의 종종걸음과 칭칭 둘러맨 목도리,
배달 오토바이의 얇은 타이어,
차 밑 어둠에 몸을 웅크린 길고양이 한 마리.
첫눈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아름다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눈을 맞으며 뛰던 내 발걸음 대신,
이제는 타인의 발걸음을 먼저 떠올린다.
어쩌면 나이 듦의 정의란,
감응의 범위가 넓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설렘으로 충분했던 세계가
‘우리’의 무사로 완성되는 세계로
조금씩 옮겨가는 과정.
늘 지나다니는 길고양이들이 앉아 있는
자동차 밑을 들여다본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본다.
우리가 나누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온도다.
미지근한 물을 바닥에 붓고,
햇살 드는 자리에 작은 그릇을 옮겨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작다.
그러나 첫눈이 가르쳐준 건
작은 일이 제때 행해질 때만
온도가 생긴다는 것이다.
적정한 순간의 작음은
충분히 큰 일이다.
이제 첫눈은 설렘이 아닌,
‘돌봄의 문법’으로 다가온다.
어디가 가장 미끄러운지,
어디에 먼저 소금을 뿌려야 하는지,
어떤 발걸음이 위험한지.
첫눈을 바라보던 과거의 설렘은
형태를 바꾸어
돌봄의 손에서 무게를 갖는다.
사랑은 뜨겁다기보다
따뜻해야 오래간다는 사실을,
눈은 해마다 반복해 가르쳐 준다.
천천히 데워진 온도만이 오래 머문다.
그래서 우리는 첫눈을 앞질러 달리기보다,
첫눈 뒤에 남는 온도를 돌보며
겨울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햇살이 비치자 길 위의 눈은
반쯤 녹았다가 다시 얼었다.
흰색은 쉽게 회색이 되고,
회색은 오래 버틴다.
눈의 시간이란 늘 그렇다.
도착은 찰나고, 머묾은 길다.
예전에는 도착만 보았고,
지금은 머묾에 시선이 간다.
누군가의 하루를 넘어뜨릴 수도 있는 머묾,
누군가의 귀가를 늦출 수도 있는 머묾.
그렇게 타인의 발자국을 먼저 떠올릴 때,
첫눈은 더 이상 순수한 축제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축제보다 오래가는 평온이 시작된다.
창가에 서서 골목을 본다.
누군가는 미끄러지지 않으려
사소한 각도로 발을 두고,
누군가는 너무 급히 달려온다.
가로등 아래 작은 발자국들이
연필로 그린 선처럼 이어져 있다.
어쩌면 첫눈은,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리듬을 점검하게 하는
‘계절의 리허설’ 인지도 모른다.
빠른 사람은 조금 느리게,
느린 사람은 조금 더 안전하게.
도시는 눈 위에서
자기의 배려를 시험받는다.
나는 더 이상 첫눈에
설레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창밖으로 뛰어나가 셀카를 찍는 대신,
현관 앞에 소금을 뿌리고,
자동차 밑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집에 들어와 물을 데운다.
잔을 덥히고, 손을 덥히고,
마음을 덥힌다.
설렘이 ‘나에게 오는 빛’이었다면,
돌봄은 ‘내가 건네는 온기’다.
빛은 찰나를 밝히고,
온기는 겨울을 건넌다.
내리는 눈은 금세 사라지지만,
건네진 온기는 천천히 남는다.
그 남음이,
나이 듦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올겨울에도 눈은 여러 번 더 올 것이다.
어떤 첫눈은 마지막 눈처럼 내릴 것이고,
어떤 마지막 눈은 첫눈처럼 가벼울 것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해마다 문법을 고쳐 쓴다.
첫눈의 감탄사에서,
다음 눈을 위한 동사로.
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자에서,
남는 것을 돌보는 자로.
그리고 언젠가 나도,
잃어버린 설렘의 질량을 다시 안고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 나와, 첫눈 온다.”
글/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