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가 떠난 뒤에 남은 것

—— 허구를 믿는 마음이 나를 살린 방식에 대하여

by 시우

산타가 사라진 날,
나는 세상이 한 겹 얇아졌다고 느꼈다.
내가 믿어온 세계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세계를 지탱하던 침묵이
조용히 걷혀 나간 듯했다.


이전까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던 것들—
기다림, 선의, 이유 없는 친절.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근거를 요구하는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산타는 내가 열세 살이 될 때까지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켜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산타가 있다’는 말을
그저 믿게 하지 않았다.
그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조용히 머물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12월이 되면
나는 장난을 치고 싶어도 한 번 더 참아 보았고,
괜히 말썽을 부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엄마 말도 더 잘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일이
산타를 맞이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준비처럼 느껴졌다.


양말은 해마다
조금 더 큰 걸로 바꾸어 달라고 졸랐다.
작은 양말로는
내가 바라는 것들이
다 들어갈 리 없다고
진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벽난로도 굴뚝도 없는 집에서
산타는 도대체 어디로 들어오는지,
나는 꽤 오래 고민했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밤이 되면
나는 산타를 놓칠까 봐
잠들지 않겠다고 했다.
세수물을 떠놓고
동생과 나란히 앉아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렸다.

자기 전에는
양말의 위치를 다시 고쳐 걸었고,
너무 어두우면
산타가 우리 집을 지나칠 것 같아
불을 하나 남겨두고 잠들었다.


아버지는 그 모든 과정을
고쳐주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믿음이 설명되기 전에
먼저 살아볼 수 있도록
곁을 비워두었을 뿐이다.


그 믿음은
진실이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그 믿음을 허락받은 동안
내 마음이 세상을 향해
먼저 닫히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겨울,
나는 결국 알게 되었다.
선물은 벽장에 숨겨져 있었고,
발자국은 계획되어 있었으며,
산타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였다는 것을.


그때 아버지는
무너진 동심을 주워
다시 붙이지 않았다.
대신 한 문장을
내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믿었을까?’


그 질문은
산타가 없다는 사실보다
훨씬 오래 나를 붙잡으며,
‘있다’와 ‘없다’ 사이에
내가 너무 쉽게 그어 두었던 선을
조용히 흐리게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이
신화를 사실로 믿지 않았다면,
그 이야기는 왜 그렇게 오래 남아 있었을까.
왜 전쟁과 사랑과 귀향의 순간마다
다시 불려왔을까.


나는 그 질문 앞에서
허구를
‘사실의 반대’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방식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어떤 허구는
존재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존재를 견디기 위해
인간이 오래 다듬어 온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더 오래 살아남고,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지켜주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이해.


허구를 믿는다는 것은
현실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허구는
현실만으로는 건너갈 수 없는 구간을
사람에게 조용히 허락한다.


그리스 신화는 허구다.
그러나 2025년에도 여전히 숨을 쉰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오늘의 전쟁을 비추고,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우리가 끝내 돌아가려는 자리의 이름이 된다.


신들은 사라졌지만,
신들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 했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허구는 사실이 아니지만,
의미가 없었던 적은 없다.


그래서 산타 역시
있다, 없다의 문제로만 남지 않는다.
산타는 사실이 아니라
상징으로 살아남는다.
누군가가 너를 잊지 않는다는 문장,
설명되지 않아도
기다려볼 만한 시간이 있다는 약속으로.


그 문장을 믿는 동안
사람은 세상을 조금 덜 경계하고,
조금 더 오래 기다릴 수 있다.


그날 이후로 내게 12월은
산타를 기다리는 계절이 아니라
의미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는 산타의 부재 앞에서
무언가를 증명하려 들기보다
질문을 남기고
스스로 사유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학에 입학하던 해,
나는 배낭을 메고
책 속의 신화가 태어난 장소를 찾아 나섰다.

바람과 돌과 바다의 온도 속에서
허구가 어떻게
현실의 얼굴을 얻는지
내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테네의 햇살은 생각보다 거칠었고,
신전의 기둥은 사진보다 더 조용했으며,
바닷바람은 오래된 이름들을
무심한 듯 정확하게 되살렸다.


그곳에서 나는 알았다.
신화를 찾는다는 건
신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놓지 못하는 질문들을
다시 손에 쥐는 일이라는 것을.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것은
산타가 아니었다.
허구를 허구로 끝내지 않는 태도,
사라진 것에서도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눈,
그리고 어떤 사실이 무너진 뒤에도
질문은 더 깊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12월이 되면
산타를 떠올린다.
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아니라,
그를 믿게 했던 시간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남겨두었는지를
다시 묻기 위해서.


그리고 나에게 되묻는다.
그때 아버지가 던진 그 질문처럼.


지금의 나는
무엇을 믿으며,

그 믿음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살게 하는가.



글/ 시우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