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탁과 계절 사이에서 닮아가는 과정을 보며
나는 원래 고기를 잘 먹지 않았다.
특별한 신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씹을 때 남는 질감이 싫었고,
입 안에 오래 머무는 기름의 무게가 불편했다.
살아 있던 것의 흔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는 느낌도
피하고 싶었다.
체질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보다 먼저
마음이 이미
한 걸음 물러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삶의 방식이 바뀌었고,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게 되었다.
함께 장을 보고,
비슷한 시간에 배가 고파지고,
같은 식탁에 앉는 일이
하루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었다.
그 시간들에는
설득도, 합의도 없었다.
어느 날,
고기를 먹고 있는 나를 보았다.
특별한 결심 없이,
특별한 감정도 없이.
그 장면은 놀랍다기보다
조용히 어긋나 있었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아주 작은 시차가
이미 생겨 있었기 때문이다.
입맛이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불편한 감각은 남아 있고,
고기는 지금도
내가 먼저 찾는 음식은 아니다.
다만 예전처럼
즉시 피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거부가 반사처럼 튀어나오지 않고,
식탁 위의 선택지 중 하나로
그 자리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변화는
의지의 결과가 아니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별다른 대화 없이 저녁을 지나고,
같은 하루의 리듬을 공유하는 동안
몸이 먼저
반응을 바꾸었다.
나는 생각을 고치지 않았고,
몸이 먼저
시간을 받아들였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닮아간다는 것은
취향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통과하는 동안
거부의 강도가
조금씩 낮아지는 일이라는 것을.
비슷한 일은
계절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일어났다.
눈을 좋아하던 아버지와
비를 좋아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
햇살은
내게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봄은 늘
조금 빠른 계절처럼 느껴졌다.
나는 봄을 좋아하지 않았다.
봄은 갑작스럽고,
세상은 한순간에 밝아져
모두가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다.
겨울의 느린 정직함에 익숙한 사람에게
그 밝음은 때로
설명되지 않은 낙관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자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봄을 대하는 나의 자세도
조금 달라졌다.
빛이 방 안에 오래 머무는 시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오후를
함께 지나며
봄은 시작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잠시 쉬게 하는 계절처럼 보였다.
새로움 때문이 아니라,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먼저
느슨해졌다.
돌이켜보면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라기보다
서로의 리듬에
몸을 오래 노출시키는 일에 가깝다.
이해는 설명으로 끝나지만,
함께는
시간을 통해 몸에 남는다.
입이 기억하고,
잠드는 시간이 기억하고,
어느 날은
마음이
뒤늦게 따라온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닮아간다는 것은
차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차이가 있는 상태로도
같은 시간에 머무를 수 있게 되는 능력을
몸이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게 되었다고 해서
고기가 가장 좋아진 것은 아니고,
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해서
겨울을 잃은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세계를 통과하는
나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을 뿐이다.
그 느려짐 덕분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뒤늦게
따라왔다.
닮아가는 과정의 의미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나로 남아 있으면서도
내 경계를
조금 더 둥글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세계는 바뀌지 않았는데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조금 이동해 있다는 사실.
그래서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일이다.
그 반복 속에서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선택이
어느 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능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닮아간다.
설득해서가 아니라,
같은 시간을 견디며
서로의 세계에
조금씩
몸을 맡기면서.
글/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