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승리'를 읽고
흥미로웠다. 초고밀도의 도시가 탄소배출이 적어 오히려 교외보다 친환경적이라는 말, 확장이 아니라 높이의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 도시가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몰린다는 말. 세계 여러 도시의 흥망성쇠를 분석한 데이터가 그의 주장을 탄탄히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책은 철저히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자본가의 입장에서, 그리고 ‘도시’의 입장에서 쓰여졌다. 이 책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도시의 번영, 개발에는 그렇게나 많은 수치와 주석을 들이대면서, 인간 개개인의 삶에 대해선 ‘도시는 상처를 줄지도 모르지만,’ 따위의 말로 쉽게 생략해 버린다. ‘건물이 아닌 인간 중심의 도시 개혁’, ‘교육이 중요하다’ 라며, 주장에 ‘인간적인 면’을 가미하여 포장하려 하지만, 싸구려 포장지는 금방 표가 난다. 작가의 관심은 오로지 ‘번영, 개발, 성장’이다. 그의 주장에 인간 개개인의 삶이 설 자리는 좁디좁다. 인간을 위한다지만, 인간을 착취하게 되는 극단적 자본주의의 뻔한 시나리오처럼 주객이 전도되었다.
“마천루는 도시들이 똑같은 양의 지면 위에 엄청난 양의 지면을 추가할 수 있게 해준다. 도시 중심부 부동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마천루는 뜻밖의 선물 같았다.”
그는 마천루 위에 올라, 더 높은 마천루를 쌓아 올려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에겐 지상의 인간에게 드리워진 마천루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아래를 내려다보는 법을 잊었거나, 그림자가 너무 짙었나 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는 바로 ‘바우처’이다. 그는 ‘바우처’ 신봉자이다. 도시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금을 토대로 한 ‘바우처’를 제시한다. 고층 건물, 교통, 빈부격차, 교육 문제 등에 대해서 피해자 혹은 약자들에게 ‘바우처’를 제공하면 해결된다고 말한다.
“즉, 고층 건물이 일조권이나 조망권을 침해해 사회 비용을 일으킨다면 그러한 비용이 합리적인 추정 근거를 마련해서 건설업자에게 적절히 비용을 징수하면 된다. (중략) 이렇게 해서 걷은 세금은 신규 건축 프로젝트로 인해서 일조권을 빼앗긴 이웃들처럼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된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웃들이 가난의 재정적 부담과 사회적 부담을 혼자 짊어질 수밖에 없게 되면 그 이웃들은 도시를 떠나게 될 것이고, 도시는 더 가난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고립될 것이다. 더 실효성이 있는 접근 방법은 정부의 고위층들이 가난으로 인해 추가된 비용을 상쇄하는 자금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조권이나 교육의 문제는 ‘바우처’로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고민이 생략되어 있다. 인간이 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교육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결여되어 있다. 그저 “햇빛을 볼 수 없어? 그럼 돈으로 계산해서 줘.”, “빈부격차로 교육의 효과가 없어? 그럼 학생들을 분리하고 자금으로 보조해줘”라는 식이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겨울을 보낸 적 있다. 북반구의 겨울은 고약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와 눈이 번갈아 내리고, 오후 3~4시면 해가 졌기에, 어두울 때 출근하고 어두울 때 퇴근했다. 하루 종일 해를 볼 수 없었다. 난 우울증에 걸리기 직전 독일을 탈출했다. 그 시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드물게 해가 쨍하고 뜨는 날이면, 근방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벤치에서 햇빛을 쐬며 점심식사를 하는 모습. 겨울의 어두움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도, 햇빛이란 그렇게라도 향유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 아니다. 그들은 그런 날씨 속에 살았기에 햇빛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존재란 걸 알았던 것이다.
교육에 관한 그의 관점도 문제다. 그는 가난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이 같은 공립학교에 다니게 되어, 교육에 대한 투자효과가 미미하고 도시의 중산층과 부유층의 교외 이탈을 야기하기에 학생들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별도의 교실이건 마그넷 스쿨(영재 교육 프로그램)이건 수준에 따라서 학생들을 그룹으로 묶으면 도시의 공립학교 교육은 똑똑한 아이들을 둔 부모들에게 더욱 매력적이 될 것이다. 이런 방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가난한 아이들로부터 좋은 동료들을 빼앗아갈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말이 맞다. 그러나 그러한 좋은 동료들이 교외 지역으로 도망가서 가난한 학생들이 그들을 잃게 된다면 차라리 부유한 가족들을 도시에 머물게 하는 게 더 낫다.”
이것이 과연 옳은 방법일까? 청소년기는 가치관이 확립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이때 단순히 경제적 논리에 의해 인간을 그룹으로 나누고 서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자체를 단절해버리면 그들의 공감능력은 심각하게 떨어질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도시는 다양하고 혼잡하고 인적 집적도가 높다. 이런 도시에서 그가 주장하는 교육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과연 건강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항상 같은 위치에서 같은 사람들과 같은 풍경만 바라보며 편협해진 시야로 이 복잡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겠냐는 말이다.
좀 더 근본적이 논의가 전제됐어야 한다. ‘현 상황이 이러니, 학생들을 분리시키면 돼’ 가 아니라 왜 그러한 상황이 만연하게 됐는지를 고민했어야 했다. 왜 부모들이 ‘내 자식은 가난한 학생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하면 안 되겠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왜 이런 사회가 되었는지를 따져봐야 했다. 공감능력을 함양시키기보다 경쟁을 부추기고 보다 많은 부와 높은 지위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던 교육의 잘못된 방향성이 문제였다. 이를 부추긴 기성세대의 잘못된 가치관이 문제였다. 교육에 서열화와 대학 진학률이라는 기업의 성과 지표와 같은 잣대를 들이댔던 것이 문제였다.
유년시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나는 단순히 ‘의사’, ‘변호사’, ‘공무원’ 등의 ’ 직업’을 적을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중간, 기말고사를 보면 등수를 확인하기에 급급했다. 경쟁에서 이겨서 고층건물의 꼭대기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내가 겪은 한국의 교육은 ‘교육이 숙련된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작가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난 그의 바람대로 숙련된 노동자가 되었지만, 서울은 나를 진정으로 풍요롭게도, 행복하게도 만들지 못한 것 같다.
진정한 교육은 동일한 질문에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며,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써 내려갈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다. 또 ‘너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며, 어떻게 행복해지고 싶은지’ 물을 줄 알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그의 인격까지 가난한 것이 아니라는 사고와 물질적 부와 권력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내는 것이다. 인간을 이해하고 다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 한 가지 사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 이것이 교육이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성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훨씬 복잡하다. 햇빛도 쐬야 하고, 빈부격차를 넘어 공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도 공유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바우처’ 같은 것으로 뚝딱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다.
그는 환경보호주의자들이 말하는 신화를 배척하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거짓에 속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20세기를 뒤덮은 친개발주의, 성장 일변도 정책 신화가 초래한 수많은 과오에 대해선 관대하다. 금융산업으로 다시 일어선 뉴욕을 찬양하면서, 그 연장선 속에서 끝없는 부에 대한 탐욕이 초래하고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세계 금융위기의 근원임에 대해선 깊이 다루지 않는다. ‘인간’ 중심의 도시 개혁이라고 말하는데, 그 희생자들은 그의 ‘인간’에는 속해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인적자본’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도시의 번영을 위해 인적자본을 모아 경쟁시키고 상호 학습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적자본이 아니라 ‘인간’이다. 도시 발전의 도구가 아니라 개개인의 삶과 개성을 지닌 ‘인간’인 것이다. 우리가 상호 학습해야 할 것은 경쟁에서 이기고, 끝없는 성과를 창출하는 방법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돌보는 방법이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끝없는 고층 빌딩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에게 드리워진 그림자이다. 이젠 ‘인적자본’으로서 저지른 지난날의 실수를 되짚어보고 ‘인간’으로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우린 항상 변화를 쫓고 변화에 쫓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끝은 항상 우리의 예상을 빗나갔다. 시간이 지나고 도쿄와 싱가포르, 뉴욕이 디트로이트처럼 몰락할지 아무도 모른다. 반대로 디트로이트가 지금도 번성했다면,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가 도시 승리의 공통 요건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변화에 대한 어떤 계획을 구상하든, 완벽하지 않을 것이고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세상엔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다. 어떠한 변화 속에도 근본이 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함양하고 지켜내야 할 것들이 있다. 개발과 성장, 그리고 도시가 우리에게 문명과 수많은 이로움을 부여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만큼 소중한 가치들을 많이 잃어왔다. 이제는 끝없는 변화에 대한 강박보단 인간 중심의 근본 가치들을 굳건히 해야 할 때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도시를 만들고, 그 도시가 다시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도시는 정말 복잡한 공간입니다. 마스터플랜 자체가 황당한 생각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튼튼한 기본 틀을 짜는 일입니다.” – 얀 겔의 위대한 실험(다큐멘터리) 中
도시의 기본 틀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도시가 아니라 ‘인간’이 승리해야 한다.